운동장을 한바퀴돌 때마다 심장의 위치가 좌우로 바뀌는 일이 일어난다면? 내려갔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계단이 있다면?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네덜란드 판화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her)의 그림 속에서는 늘 가능하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아름다운 새로 변해 하늘로 비상하는 물고기들, 그림 속에서 걸어 나와 내 주위를 돌다가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각각의 방향에서 서로 다른 중력이 작용하는 공간 속 어떤 사람에게는 벽이 바닥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천장이 바닥이 되어 모두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과연 누가 자기가 서 있는 공간만이 실제 공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까맣게 잊고 있던 이 이율배반적인 에셔의 작품을 다시 떠올리게 된 이유는 최근에 친구들과 본 영화 인셉션(Incetion)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방학숙제 교재 속에 착시현상의 예로 들여놓은 그의 그림들이 하도 신기해서 한동안 벽에 붙여놓고 바라보곤 했는데 덕분에 이후 딱딱한 과학 과목에 큰 흥미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잊고 있던 이미지들이 영화의 포스터는 물론이고 영화 내에 존재하는 미로와 같은 건축물들의 구조와 형태, 계단 등 곳곳에서 상징의 장치로 등장하고 있었다. 아마도 남의 기억을 훔치고 기억을 심는 허구적 캐릭터가 가지는 내면의 표현으로 에셔의 작품만큼 잘 어울리는 이미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림 자체보다는 철학적인 모순을 설명하는데 더 많이 소개되는 그의 작품은 실제와 허상 사이의 관계라는 철학의 오래된 질문을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마치 중국의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한바탕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자기가 되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는 호접몽처럼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공간. 마치 마술의 집, 거울의 방에 들어갔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에셔는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 일상의 당연한 체험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고 이 세상이 보이는 것 그대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좌우상하, 멀고 가까움이라는 기본적인 개념마저도 상대적인 것이며 서있는 공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생각 너무도 자명한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의 작품은 현실에선 불가능한 구조물들을 아주 그럴듯하게 느껴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불안하고, 긴장하게 한다.
사실 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며 중력이 무시된 기묘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낯설음은 살바도르 달리나 르네 마그리트 등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종종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에셔가 크게 구별되는 것은 대부분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이 일상의 세계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느낄 수 있게 하는데 반해 에셔의 작품들은 아주 이성적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실제 경험상으로는 모순된 것에 실제적인 느낌을 부여하는 에셔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이상하고도 불가사의한 고리 속에 매달린 꼴이 되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확인했다고 느끼는 실재란 존재하는가?
영화 ‘인셉션’의 포스터(왼쪽)와 에셔의 작품 ‘상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