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만 칼럼/탁월한 코칭 리더가 되라(42)에스더 효과
2010-08-07 (토)
에스더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의 자녀로서 어려서 부모를 여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바사(페르시아)의 왕인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된 행운아였다. 그가 왕궁에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잘 지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유대인들을 시기하는 하만이라는 자가 왕의 측근 권력자로 득세하면서 음모를 꾸며 유대인들을 몰살하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에스더의 후견자요 외삼촌인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 4:14). 이 말을 들은 에스더는 깊은 고민과 갈등에 빠졌다. 만일 허락 없이 왕 앞에 나가 왕의 조서를 취소해 달라고 청원할 경우 십중팔구 반역죄로 오해를 받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고, 모른 척하고 가만히 있으면 동족 전체의 운명이 위태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스더는 동족의 위험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자기 한 사람의 목숨보다 유대인 전체의 운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에게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모르드개의 말대로 자신이 지금 왕후에 자리에 있는 것이 위기에 처한 동족을 구원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에스더가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왕 앞으로 나가면서 한 말이 있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이다. 목숨을 건 에스더의 희생적 용기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동족을 위기에서 구원했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을 “에스더 효과(Esther Effect)"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로 치닫고 있다. 이런 때 일수록 자기희생을 아끼지 않는 에스더 같은 희생의 리더가 많이 일어 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에스더 왕후의 희생정신은 현대식 표현으로 말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다. 가진 자, 혹은 엘리트의 책임감이다. 요즘 세계 어디를 “가진 자의 책임”이 화두다. 가나 가진 자와 못가진자 사이의 형평을 도모하는 분배 리더십 문제로 모두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영국의 이튼스쿨(Eton School)을 통하여 배울 수 있다. 먼저 살펴 볼 것은 영국의 이튼스쿨이 최고의 명문 학교가 된 것은 그 학교가 귀족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말하는 사립학교와 다른 점이다. 한국에선 명문 사립이라면 우선 대학 입학률이나 직장 취업률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영국에선 그 개념부터 다르다. 영국의 이튼스쿨이 명문이 된 것은 희생, 헌신, 봉사, 이 세 가지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났을 때 제일 먼저 달려 나가는 젊은이들은 언제나 이튼스
쿨 출신이다. 전쟁터에서 제일 앞장서는 지휘관도 역시 이튼스쿨 출신이다.
그래서 한국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명문학교에 대한 시비가 없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에 대한 시비가 정리되려면 이튼스쿨의 고상한 희생정신부터 배워야 한다. 명문학교는 명문학교 다운 올바른 리더를 배출해야 비로소 명문의 자격이 있다. 그리고 명문학교다운 도덕적 책임감이 확립 되면 공사립 학교간의 시비는 자연히 해결된다. 미국의 사립 명문 예일(Yale)대학교 중앙으로 들어가면 누구나 놀라는 건물 하나가 있다. 중앙 도서관을 마주바라보고 있는 명예의 전당이다. 이 건물 안에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이 대학교 출신으로 제일 처음 순교한 선교사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내 기억으로는 중국에서
순교한 선교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 다음에 목사들, 1,2차 세계 대전과 6.25전쟁, 베트남 전쟁, 중동 전쟁 참전자들의 이름이 사면 벽을 깨알처럼 채우고 있다. 진정한 명예의 위상은 리더의 희생정신과 봉사의 수준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예일 대학에 가면 누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미국도 영국과 같이 공사립 학교간의 갈등과 시비는 아예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 이 문제로 갈등이 심각하다. 공사립 학교문제로 서로 머리가 터지도록 싸운다. 이 지구촌에서 교육계가 보수와 진보로 분열되고, 교총과 전교조조로 나뉘어 싸우는 나라는 아마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에 오래 살아보아도 이런 희한한 광경은 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한다. 이런 문제는 이념의 공방으로 해결 될 문제는 아니다. 이건 가진 자의 도덕적 책임감으로만 해결될 문제인 것이다. 어제 매우 신선한 단어 하나를 들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였던 빌 게이트가 말한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란 단어다. 재계의 거물 인 워런 버핏과 함께 일으킨 ”기부약
속(The Giving Pledge)“운동에 40여명의 거부들을 동참시켜 6주 만에 1250억 달러를 모아 자본주의 경쟁에서 뒤처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도덕적 자본주의“ 개념이다. 그 정신이 꼭 에스더와 이튼스쿨을 닮았다. 차제에 한국에서도 ”창조적 자본주의“ 운동이 힘차게 일어나 좀 더 화평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