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메이 정의 문화읽기 - 현대미술에게 말 걸기

2010-07-02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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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전시장에 들어섰다. 거기 걸린 그림들을 둘러봤다. 생판 뭔지 못 알아먹을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때 옆에서 함께 그림 구경하던 여친이 물었다. “옵빠! 저게 무슨 그림이야?” 사실은 나도 잘 모르는 그림이다. 작가의 약력이나 작품 평론을 사전에 읽지 않으면 전혀 모를 수 있다. 바로 이때 딱 한 마디만 하면 깨끗이 해결된다. “으응! 그건 개념미술이야!” (조영남의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중에서) 하긴 현대미술치고 개념미술 아닌 건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루두루 개념미술이니 대답이 궁해졌을 때면 개념미술이라고 둘러대면 된다는 우스갯말일 것이다.

사실 현대미술을 대하게 되면 난해하다거나 황당한 느낌과 함께 이것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나? 이런 생각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대부분의 작품들의 뿌리가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의 소위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인 경우가 많다.

특히 개념미술은 음악의 재료가 소리인 것처럼, 개념이 재료이며 개념이라는 것은 언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작품 속에 언어, 즉 텍스트가 재료로 사용되는데 미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한 글씨, 개념, 과정… 등이 미술의 재료일 수 있다는 생각은 쉽게 수용하기 힘든 궤변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미술을 낯설게 만드는 큰 이유 중 하나인 개념미술에 많은 영향력을 준 대표적인 미국의 개념미술 선구자, 존 발데사리의 대규모 회고전(John Baldessari: Pure Beauty)이 LACMA에서 지난 주말 개막되었다.

코와 귀만 강조된 얼굴들, 작품 제작의 과정을 그대로 적어놓은 글들, 얼굴 부위에 원색의 동그라미를 덧칠해 사진 속 인물에게 완벽한 익명성을 부여한 사진 작업들, 전통적인 의미의 그림은 없고 오로지 텍스트만 존재하는 캔버스… 등은 기존의 미술 감상 태도로는 도무지 의미가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예술이라고 믿어오던 ‘진지하고 유일하고 보편적이면서도 독창적이면서 감동과 칭송을 받아 마땅한’ 전통적인 예술관을 송두리째 부수고자 하는 의도와 실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캔버스와 물감과 붓으로 창작되어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 미술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져 왔던 전통적인 회화의 입장을 버리고, 완성된 작품보다는 제작의 아이디어나 그 과정이야말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반미술적 제작 태도를 갖고 있고 게다가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언어가 더 일차적인 미술 감상의 장치로 작동한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개념미술이라는 말만큼이나 낯설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의 미술언어이다. 그러니 우리시대 미술과의 소통을 미리 단절하는 대신 미술을 감상하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태도를 한번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종래의 미에 대한 가치가 결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단지 전통에 의해서 습관처럼 길들여져 온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때 텍스트만 존재하는 캔버스는 눈에 보이는 언어와 그것이 기호로서 뜻하는 개념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진지한 연구였으며, 코와 귀만 강조된 얼굴들은 시각과 인식의 문제를 다루는 사유적인 작업의 결과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진, 회화, 글씨, 영화, 설치미술을 통해 지난 50여년 간 왕성한 상상력과 유머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 발데사리와 진정한 소통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 정 - 앤드류샤이어 갤러리 관장


존 발데라시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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