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쟁의 상흔

2010-06-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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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울리던 포성이 매일 가까워 오더니 북한의 야크전투기가 서울 상공을 저공비행한 다음날인 6월28일 새벽, 간간이 들리던 따발총 소리마저 그치고 사방은 적막감에 싸였다. 그때 옆집에 살던 이응로 화백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는데 빨리 가서 환영하지 뭣들 하고 있소!”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살금살금 퇴계로 큰길로 나가 보았다.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들이 군모와 군복은 물론 말이 이끄는 각종 포차에 풀과 나무 가지로 위장하고 개선장군처럼 행군하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급히 그려가지고 나온 인공기를 흔들며 환호성을 외치고 있었다.

해군본부 건물 입구에는 헌병 복장을 한 국군이 죽어 반듯이 누워 있었지만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응로 화백은 반미 포스터를 그린다는 소문이 있었고 훗날 파리로 거처를 옮겨 살다가 백건우·윤정희 부부를 월북시키려 했다는 소위 동백림 간첩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었던 3개월은 천지개벽한 듯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제일 급선무는 먹는 문제였다. 처음 한 달간은 비축해 놓은 식량이 있어 다행이었지만 그 뒤로는 시장경제가 마비된 상태라서 돈을 가지고도 식품을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외할머니는 옷가지와 패물을 가지고 뚝섬까지 걸어가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시골마을(지금의 강남)에 다니며 쌀과 채소와 물물교환을 해오셨다. 그러나 공습이 심해지면서 이것도 불가능해져 속절없이 하루에 한 끼 죽 뜨물로 연명하였다.

미군의 폭격이 늘어나면서 교량 복구를 위해 그리고 인천상륙 후에는 부쩍 늘어난 시체 매장을 위해 밤마다 각 가구 당 한 명씩 강제 동원되었다. 부역은 대부분 노인과 여자들 몫이었다. 청장년 남자들은 의용군에 징발될까 봐 아예 종적을 감춰버렸고 우리 또래의 남자아이들도 몸조심할 정도였다.

선친은 농촌운동을 일으켜 주민들이 송덕비까지 세워주신 분인데 단지 지주라는 이유로 공부까지 시켜준 친척의 배은망덕한 고발에 반동분자로 지목되어 일찌감치 납북되셨고 우리 가족은 처형 명단에 올라 매일 밤을 이집 저집 도망 다니다가 가까스로 유엔군을 맞았다.

공산치하 기간 동네사람들을 부역에 동원시키느라 인심을 잃은 통장은 악질로 낙인찍혀 유엔군이 서울 입성하던 날 바로 내 눈앞에서 즉결 총살되었다. 당시에는 시체들이 너무 흔해서 돌처럼 느껴졌고 지금도 남산자락에는 가족을 잃은 수많은 주검들이 묻혀 있을 것이다.

전쟁은 모두에게 비극과 파괴의 상흔을 남긴다. 역사를 뒤돌아 볼 때 모든 전쟁은 정의보다는 불의가 힘을 가졌을 때, 평화를 원하는 쪽보다 분쟁을 조성하는 쪽이 강했을 때 일어났다. 바꾸어 말하면 평화는 전쟁의 억제력을 가졌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힘이 없는 평화는 결국 굴종일 뿐이다. 평화주의자나 인도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은 너나없이 똑같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있다.


조만연 /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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