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족필(足筆)

2010-06-08 (화) 12:00:00
크게 작게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이원규(1962 - )


작년과 올해, 고국의 국토를 종단, 횡단하며 걸었다. 만 리 길은 못 되고 겨우 2,700리 쯤 걸었지만 발에 염증이 생겨 ‘발이 날개고 한 자루 붓’이라는 사실을 발바닥 통증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붓으로, 어떤 사람은 발로, 어떤 사람은 몸으로 시를 쓰는 것 같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시인이다. 먼 산의 뻐꾸기 소리를 듣거나 혹은 저 들풀들 곁에서 노숙을 하며 꽃잎을 들여다보게 되거든 내가 두 발로 써놓은 시라고 여겨주소서.


김동찬 / 시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