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무의 허물

2010-04-13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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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나무는
꼭 한 뼘만큼 자랐다
나무의 부드러운 경계가 만드는 오후의 공터에서
아이들은 비석을 세우거나 서 있는 비석을 넘어뜨렸다
그 때마다 나무의 여린 가지 끝을 흔드는
바람이 불고
나무가 거느린 녹색의 잎만큼
아이들의 땅이 넓어졌다 줄어들었다
저녁이 여자들이 물뱀처럼
뒷문을 열고 나와 수군거릴 때
시끄럽게 소리를 내거나 잎을 물들이며
나무는 이 저녁의 이야기를
또 감추는 것이다
나무는 그렇게 저녁의 배후였다
아버지와 형제와 그리고 친구들이 모두
나무의 어둠 밑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나무는 녹음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서 있다
가지가 찢어져도 나무는
시들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저렇게 오색찬란하기만 하다

여태천 (1971 - )


나무는 어두움의 배후세력이다. 나무 밑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모두 녹음으로 감춰주고 있다. 그것이 나무의 허물이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도, 그늘도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이 쉬기도 하고, 연애도 하고, 한 뼘씩 자라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나무는 무죄다. ‘나무의 허물’은 ‘나무가 감춰준 사람들의 허물’이다.


김동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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