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의 지팡이

2010-04-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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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만한 빨간 개구리가 알에서 막 깨어나는 올챙이들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어미는 부화된 올챙이들을 연못에 풀어놓지 않는다. 천적들 때문이다. 먼저 깬 올챙이부터 등에 업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무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른다. 수십 미터나 되는 수직거리를 곡예사처럼 올라간다.

나무꼭대기엔 열대 난초들이 피어 있다. 난초 밑동엔 빗물이 고여 한줌 웅덩이가 생겼다. 그 속에 올챙이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배에서 계란노란자위 같은 영양소를 웅덩이에 떨어뜨린다. 먹이까지 챙겨주고 어미는 나무 밑으로 내려가 다른 올챙이를 업고 오르기를 반복한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생명’이란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이다. 첨단 촬영기구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밀림 생태계의 모습을 담아 최근 화제가 되고 있다. 종족계승 본능의 발로라 하지만 어버이의 사랑을 이보다 더 뜨겁게 그릴 수 있을까.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웅덩이에서 다 자란 올챙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튀어나간다. 해설자가 말한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건 미물이나 사람이나 같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건 사람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망백(望百)에 돌아가셨다. 다리가 약해져서 걷질 못하셨는데 끝까지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으셨다. 내 평생 아버지에 대한 자랑은 당신의 대쪽 같은 의지력과 피나는 고학으로 당시 조선 사람으로 드문 동경제대 농화학부를 나온 사실이었다.

"내가 졸업하자 주임교수가 소개장을 평양 콘스타치 회사로 써주셨지. 흰 양복을 입고 역에 내리니 일본인 공장장이 나와 새파란 내게 구십도로 인사를 하더라." 저녁 반주만 드시면 아버지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연구생활을 즐기시는 학자셨지 사업가가 아니었다. 여러 발효식품 사업에 손을 대셨지만 여의치 못했다. 대학에서 초빙 제의를 해오고, 큰 회사들에서 동업 의사를 물어왔지만 번번이 거절하셨다. 원칙을 벗어난 족벌식 경영과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세가 기울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융통성 없는 자존심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미국 와서 내가 가장이 되고 직장인이 돼서야 오래 잊었던 아버지 생각이 간간이 나기 시작했다. 가장의 인생이란 원칙에 선 자존심과 생존을 위한 책임감 사이에서 늘 갈등하며 사는 거란 깨달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원칙이었고, 나는 생존에 기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이 다 도미한 후에도 홀로 서울 아파트에서 사셨다. 그러다 80되시는 해, 가족들의 오랜 간청 끝에야 오셨다. 오시는 조건으로 자식들 신세 안 지려는 당신의 신조를 도와 달라고 하셨다. 부지런한 아버지는 자식들 집을 돌며 손자들을 키우시고 머슴처럼 일하시면서도 건강에 좋다고 흡족해 하셨다.

"내 죽은 뒤 장기를 기증하고 화장해다오." 햇병아리 의사인 큰손자에게 아버지는 간곡히 부탁하셨다. 그리고 가족들 손을 잡고 편안히 돌아가셨다. 유언대로 아버지의 재를 양지바른 백일홍나무 밑에 모셨다.

평생을 원칙과 신의를 굽히지 않고 살아오신 아버지로선 지팡이를 짚는 일이 수치였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버지의 깊은 속을 읽지 못했다는 회한이 밀려왔다. 그제야 뒤도 안 돌아보고 웅덩이를 뛰쳐나가던 그 올챙이의 뒷모습이 내 못난 모습과 겹쳐졌다.


김희봉 / 수필가·환경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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