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유목민 시대’의 은퇴

2010-04-07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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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업에 다니는 50대 한인 정모씨는 은퇴 후 필리핀 이주를 심각히 고려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동생을 보기 위해 매년 한차례 씩 필리핀을 방문하고 있는 정씨는 이 나라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필리핀은 물가와 인건비가 미국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싸다. 대학 졸업자 초봉이 120달러 정도이고 입주 가정부와 운전사 월급은 60달러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회 시스템이 미국식이다. 교통 신호등에서부터 법규에 이르기까지 미국식 제도를 따르고 있다. 영어권 국가인 만큼 영어만 좀 할 줄 알면 언어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정씨가 필리핀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 사람들이 더할 수 없이 친절하기 때문이다. “느긋하고 친절한 사람들 속에 있다 보면 혈압이 낮아지는 것을 느낄 정도”라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같은 돈을 가지고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좀 더 편안한 생활을 위해 다른 나라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21세기적인 사회현상이다.

이것을 가능케 해 주는 것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다. 21세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어느 시대에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높은 이동성이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디지털 문화가 확산되면서 과거에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공간의 이동이 가능해 지고 있다. 이런 트렌드를 프랑스의 천재적인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디지털 유목문화’라고 부른다. 디지털 유목문화가 확산되면서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거의 평생을 사는 농경문화적인 생활 스타일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특히 미국 은퇴자들 사이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적은 수입으로 좀 더 나은 생활이 가능한 곳을 찾아 움직이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 달 1,000달러 내외의 소셜시큐리티 만으로는 안락한 생활이 불가능해진 현실이 이런 추세를 더욱 부채질한다.

필리핀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다시 필리핀을 찾아 은퇴생활을 하는 것은 이미 흔한 일이 됐고 최근에는 중남미의 에콰도르가 미국 은퇴자들 사이에 새로운 거주지로 각광 받고 있다고 MSN이 소개하고 있다.

에콰도르는 다윈이 진화론의 아이디어를 얻었던 갈라파고스 군도가 있는 나라. 마이애미서 비행기로 4시간 거리에 있는 에콰도르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그러나 이 나라가 미국 노인들의 인기를 끄는 것은 이런 자연환경 때문만은 아니다.

에콰도르는 물가가 대단히 싼데 비해 안락한 생활을 위한 사회적 환경이 아주 잘 갖춰져 있다. 수도인 퀴토의 고풍스런 집은 보통 3만~5만달러 선이고 요리와 청소를 해 주는 풀타임 가정부는 주 30달러면 고용할 수 있다. 인터넷 망이 잘 갖춰져 있고 의료진의 수준도 미국에서 교육 받은 의사가 다수일 만큼 높다. 의료비는 저렴해 일반의는 한번 방문에 15달러, 전문의는 17~29달러 정도 차지된다.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미국 달러화가 공식화폐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율 변동에 따른 달러화 가치 하락을 걱정할 일이 전혀 없다. 연 1만7,000달러 정도면 부부가 에콰도르에서 아주 안락한 은퇴생활을 즐길 수 있어 점차 많은 미국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고 있다고 MSN은 전하고 있다.


‘쾌적한 자연환경’ ‘저렴한 생활비’ ‘친절한 사람들’은 안락한 노후를 위한 최선의 조합이다. 그런데 잘 찾아보면 이런 곳들이 적지 않다. 물론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유토피아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열심히 사는데도 삶이 답답하고 은퇴가 불안한 것은 박스 안에 갇혀 벽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박스에서 나와 사방을 둘러보면 의외로 세상이 넓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물론 공간 이동은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하는 것만으로도 패를 하나 더 쥔 듯한 든든함은 느낄 수 있다. 어느 재벌의 자서전 제목을 빌어 표현한다면 ‘세상은 넓고 살 곳은 많다’고 할 수 있다 .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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