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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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귀중한 만남 - 책

2010-03-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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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 정리를 시작했다. 서적 매니아는 아니라도 좋아하는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어 내 집이라는 행복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리고 그 책들을 나는 사랑한다.

“이 세상 모든 책들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아/ 하지만 가만히 일러주지/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는 길// 그대에게 필요한 건 모두 거기에 있지/ 해와 달과 별/ 그대가 찾던 빛은/ 그대 자신 속에 깃들여 있으니// 그대가 오랫동안 책 속에 파묻혀/ 구하던 지혜/ 펼치는 곳마다 환히 빛나니/ 이제는 그대의 것이리”<허만 헤세의 ‘책’ 전문>

책을 사서 하룻밤에 다 읽은 책도 있으며 그런 책은 아직도 저자의 사상이 감동으로 남아 있다. 한 동안 찾지 못해 애타했던 책이 이제야 눈에 띈다. 책을 쓰느라고 저자는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까, 깊은 생각과 노력과 의지가 뭉쳐진 결과로 오늘 나는 편안히 앉아서 그의 무궁한 사상과 경험의 세계를 휘저으며 날아다닌다.


지난 3월11일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책도 몇 권 있어서 다시 새롭게 읽어볼 생각이다. 그 분의 고적한 사색의 생활이 글에 고스란히 묻어 있어 소유의 욕망으로 퇴색되고 있는 정신세계를 일깨운다. 법정 스님은 그 분의 책들을 절판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제 고전으로 남아서 대대로 사람들에게 생활의 절제와 무소유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텐데 몹시 아쉬운 마음이다.

책들 사이에서 특히 눈에 띈 책을 찾았다. ‘Enten-Eller’ 키케어고르가 쓴 책으로 1843년에 Bictor Eremita라는 가명으로 출판된 원본이다. 어느 사상이나 처음에는 그러하듯 그의 첨예한 사상을 글로 발표했을 때 모진 비웃음과 질시가 따랐고, 경쟁자의 혹독한 비평으로 그는 가슴에 멍들고 자존심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그 험난한 사상적 논쟁의 틈바귀에서 그는 그의 사상의 논리를 완성하기 위해 사랑하는 약혼녀와 헤어지고 그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판자들과 홀로 고독하게 싸우다가 결국 쓰러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머지않아 세계가 놀랄 것이다. 나의 사상이 세계의 지성을 휩쓸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그의 말대로 실존주의는 20세기 세계의 지성을 주도하고 지금도 우리의 뇌리에 존재한다. 이 책은 딸의 시부모님이 코펜하겐에서 구해서 보내준 선물이다.

1965년 손우성씨가 번역한 ‘몽테뉴 수상록’ 3권도 내게는 귀한 책이다. 20대에 남편을 따라 외국에 체재할 때 두 달된 딸을 키우며 생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읽을 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몽테뉴 수상록’은 당시 남편이 주문해서 선물해준 책으로 위편삼절(韋編三絶)이 되도록 애독했었다. 몽테뉴가 공직에서 물러나고 그의 아름다운 몽테뉴성에서 독서생활로 여생을 시작했을 때 “시칠리아의 왕 르네가 붓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듯이, 나는 펜으로 나 자신을 그린다”며 문학사상 처음으로 사색과 사상, 삶과 죽음에 대해서 또 인생과 자기 자신에 대해 쓴 수상집이다.

세계는, 시간은, 역사는 우리가 지향하는 여행의 도정이며 오늘을 살찌게 하는 토양이다. 우리는 과거로 여행하고 다시 책을 들고 오늘로 귀향한다. 책은 우리에게 간접경험을 통해 상상력을 키워주고 새로운 지식과 지혜와 진리를 발견해서 미래를 내다보게 하며, 반성과 사유를 하게 함으로써 우리 생의 귀중한 만남이라 할 것이다.


김인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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