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LACMA 인상파 거장 르누아르 후기작품 전시회

2010-02-17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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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지난 14일 시작된 ‘20세기의 르누아르’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전시회다. 특히나 여자들은 꼭 한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은 것이, 르누아르처럼 여성을 아름답게 묘사한 화가도 드물기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생애(1841-1919) 후반 30년간의 작품들만 조명한 이 전시에는 특히나 그가 집중적으로 그렸던 여성 누드와 인물화, 초상화가 많다. 그런데 그 시선과 표현이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한지, 그는 아마도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을까 경탄하게 된다.

목욕하는 여인, 머리 빗는 여인, 바느질 하는 여인, 책 읽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탬버린을 든 여인, 캐스터네츠를 든 여인, 피아노 앞에 앉은 소녀, 오렌지 바구니를 든 여인, 기타 치는 여인, 그리고 수많은 여인의 누드… 그는 아내를 제외한 가족과 여성들의 모습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장과 클로드는 아주 어린 시절의 모습들과 함께 소년이 됐을 때 사냥꾼이나 광대의 복장을 입혀 놓고 그린 그림들이 사랑스럽다.


주목할 만한 것은 아내의 먼 친척으로서 르누아르 집안의 가정부였던 가브리엘 르나르를 모델로 한 수많은 그림들이다. 가브리엘은 20년 동안 그 집에서 일했는데 르누아르는 특별히 예쁘지도 않은 그녀를 모델로 2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번 전시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가브리엘을 만날 수 있으며, 대가의 손을 통해 불멸의 이미지로 남게 된 행운의 여성과 시공을 초월해 일별하게 된다.

1860년대와 70년대에 인상주의를 이끌며 수많은 걸작을 남겼던 르누아르는 1880년대부터 인상주의 화법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해 1890년대부터는 루벤스, 들라크루아, 티시안, 라파엘 등 과거의 대가들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좀 더 고전적이며 자유스러운, 그리고 개인적인 터치가 가미된 인물화에 치중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 자연을 그리기보다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이 후기의 르누아르 작품들에 대해 일각에서는 ‘형편없다’는 평을 보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그는 말년에 류머티즘으로 너무 고생했는데 이 때문에 드로잉과 붓질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타당성 있다.

훗날 영화감독으로 활약했던 아들 장 르누아르가 쓴 책 ‘나의 아버지 르누아르’(Renoir, My Father)에 따르면 르누아르는 71세 되던 1912년 의사의 권유로 휠체어에서 가까스로 일어나 몇 걸음 떼다가 걷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힘을 써야 하기 때문에 그림 그릴 기운이 남지 않는다. 걷기와 그리기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그림을 그리겠다며 주저앉았다. 그 날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걷지 못했으며 매일 사람들이 스튜디오로 데려다 캔버스 앞에 앉힌 다음 구부러진 손에 천으로 붓을 동여매주어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이번 라크마 전시는 르누아르의 후반 작품들이 그동안 평가돼 온 것처럼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그는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도전하면서 노년에 접어들수록 원숙한 작품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됐다. 르누아르는 나중에는 이미지가 점점 커져서 캔버스를 꽉 채운 그림들을 그렸고, 정확한 인체비례를 무시한 채 여체의 부드러운 커브를 통해 여성성을 강조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인체비례를 무시하고 그의 눈에 아름답게 보여진 대로만 그렸다는 사실은 그가 이미 큐비즘과 입체파, 그리고 모더니즘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 전시는 그에게 영향 받은 피카소, 마티스, 피에르 보나르, 아리스티드 마이욜 등의 작품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전시장은 시대 순으로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1890년대의 그림부터 1900년대 작품들, 그리고 그가 사망한 1919년의 작품까지 돌아보도록 배치됐는데 총 80여점(회화 54점과 청동조각상 9점 및 드로잉들)이나 되는 작품들을 다 보고 나온 후에 다시 처음 갤러리로 돌아가 보면 그 30년 동안에 그의 그림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처음에 보았던 ‘르누아르 적’인 소프트한 터치와 차분하고 우아한 색채는 말년으로 갈수록 훨씬 더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붉은 색이 많이 사용된 것을 보게 된다. 그가 건강과 생명을 잃어갈수록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또한 당연하게도 느껴진다.

일생에 몇 번이나 이런 명작들을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을까.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

이번 르누아르 전은 특별기획전으로 일반 라크마 입장료와는 달리 티켓 가격이 20달러이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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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르누아르 전시회. 거장의 마지막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기획전이다.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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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1892년 작품 ‘바위 위의 목욕하는 여인’(Bather on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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