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회한의 달

2009-12-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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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툭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가만히 들어보니 허공 속 물안개에서 나뭇잎과 지붕에 잔잔한 배경소리로 비가 내리고 있다. 아직 늦가을의 풍취도 느끼지 못했는데 겨울비라니, 벌써 12월도 얼마 남지 않은 세밑이 되었다. 문득 아직 크리스마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 하며 서둘러 샤핑몰로 향했다.

우선 딸과 며느리에게 줄 선물을 둘러보느라고 상점에 들어갔다. 매장은 불경기 탓인지 썰렁하다. 어떤 한인 모녀가 옷을 입어보고 즐겁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 딸! 상냥한 내 딸이 그리워 마음이 저며 온다. 내가 힘들 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며 위로해주던 딸, 개구쟁이 남동생들을 돌보느라 어린 시절에 철들어버린 착한 딸이 보고 싶다. 저녁 6시 동부시간 9시에 딸에게 전화했다.

“아, 엄마! 중요한 일이세요?” “아니...”


이 시간에도 바쁜 딸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아쉽지만 간단히 끊었다.

삼남매를 돌보며 낮에는 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딸, 사위가 뉴욕으로 출퇴근하게 되어 더욱 바빠진 딸과 한가하게 이야기하며 정을 나눌 시간마저 접어야한다. 갑자기 회한의 전율이 몰려온다. 미래의 꿈에만 초점을 맞추고 유년의 작은 정서를 지나쳐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17세에 대학에 가느라 집을 떠나서 지금까지 공부와 연구하느라 집엔 일년에 한두 번 들리는 것이 고작이다.

쓸쓸한 마음을 접고, 서울에서 배달된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 수필집 ‘우리들의 이야기’를 펼쳤다. 남녀공학의 학교여서 남자동창들이 늙어가며 느끼는 생활 이야기가 진솔하게 쓰여 있어 읽어 갈수록 재미있다. 무뚝뚝한 남자동창들도 여자동창들하고 똑같이 아니 더 절실하게 삶의 허무와 외로움을 느끼며 앞으로 닥칠 죽음에 대한 마음의 자세를 피력하고 서로와 위로를 나누려 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던지 못했던 지간에 이제는 물러나 다 같이 할머니 할아버지로서 어깨를 나란히 인생의 황혼 길을 걷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 같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개인주의가 발달되면서 가족구성이 해체되고 고향이라는 의미가 삭제되고 국경 없이 방랑하는 노마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세계가 순간의 공통생활권에서 같은 지식과 같은 상식을 나누고 인간 본연의 느낌을 공유하므로 세계는 한 인간가족으로 묶여있다고 보아야하겠다. 그런데도 지구촌은 더 많은 전쟁과 고통과 혼돈과 기아와 소외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따뜻한 교감이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그리운 고향은 어떤 특정의 장소가 아닌 마음 속 유년의 기억으로만 남을 뿐이다.

이런 시대를 사는 아이들에게 향수로 남을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줬던가? 이민의 절박함 때문에 작은 순간들에서 즐거움과 미세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행복과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는 것을 놓치진 않았는가? 12월은 홀연히 가버린 시간의 회한으로 마음 아픈 달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헬로우?” “엄마, 저예요” “아니 지금이 몇 시인데 잠 안자고 전화하니?” “엄마 목소리가 쓸쓸하게 느껴져서...” 딸의 목소리가 잠자다가 전화하는 듯 잠겨있다.


김인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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