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짜집기 가족들

2009-12-1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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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모임을 재혼한 부부가 새 둥지를 튼 집에서 가졌다. 재혼한 부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자식들이 모두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 지난날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낸 밝고 환한 표정들이다.

어느 초겨울, 당시 50대였던 부부가 나를 찾아와 이혼선언을 했다. 그 선언은 무서운 폭발력으로 그의 가족을 산산조각으로 붕괴시켰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둘 사이에 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민 초기에는 이들 부부도 튼튼한 밧줄 같은 생존의 끈으로 묶여 있던 공동체였다.

그들은 지뢰밭 같은 삶의 최전선에서 하루 12시간씩 함께 일했다. 지금의 고생을 견디고 나면 반드시 찬란한 미래가 다가올 것으로 꿈꾸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잔인한 시간은 그들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이들의 가슴을 할퀴며 흠집을 내었다. 그들이 함께 탄 배는 구멍이 뚫려 물이 스며들고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그들은 지난날의 얼룩을 모두 지워버리고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새 둥지를 틀었다. 재혼한 남편의 전 부인, 부인의 전 남편 자녀들이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나고 있다. 이혼으로 갈가리 찢긴 조각들을 짜깁기하여 다양한 색깔의 새로운 가족형태를 만들어냈다.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 아닌 인위적인 관계로 엮어진 가족이다. 이제 핏줄 가족은 별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다문화의 미국에서 살다 보면 이질적인 전통문화와 가끔 충돌한다. 클리닉 환자들 중에 이탈리아계 혈족 커플을 만났을 때 머리가 띵하도록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 부부는 이종 사촌간이다. 남편은 아내의 이종 사촌 오빠고 아내는 그의 이종 사촌 누이동생이다. 아내의 시어머니는 그녀의 이모이고 남편의 장모는 그이 이모이기도 하다. 그들은 혈연의 고리와 부부관계가 실타래처럼 뒤엉켜 너무나 혼란스럽다.

한국 문화에서 근친상간으로 금지된 혈족 결혼은 유전성 질환을 일으킨다 하여 우생학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거창한 우주법칙의 섭리를 들추지 않더라도 동성애자들의 애정행각도 습지에서 피어나는 독버섯처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개방된 성문화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미국에 동화되어가는 한인들의 가족문화를 다시 재정립해야 한다. 전통적 가족 가치관을 지키는 커플은 낡은 시대의 아날로그 커플이라는 말들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 가족윤리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하나 둘 나이테의 무늬를 그려가는 고목나무처럼 연륜의 깊은 주름살이 잡혀가면서 함께 늙어가는 부부들이 줄어들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초고속도로 질주하는 디지털 시대를 역류할 수 있을까?


이제 연말 가족 모임에는 핏줄로 이어진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줄어들고 있다. 핏줄이 아닌 인위적 관계로 연결된 ‘짜깁기 가족’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고 있다. 가정이 해체되고 그 찢어진 상처에서 돋아나는 새살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가족 형태다.

실패한 결혼을 성공으로 역전시키려는 역동적인 삶의 모습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박민자 /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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