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 김연수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케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만 15년, 김연수는 여섯 권의 장편소설과 이번에 출간된 네 번째 작품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까지 소설로만 열 권째 작품집을 선보였다.(그러고도 그는 지금 두 편의 장편을 연재중이다.) 그러고 보니 이보다 더 ‘삶의 이야기’를 갈망하는 작가가 또 있었나 싶다. 그사이 ‘나’의 이야기를 찾아 끊임없이 제 안으로 향했던 작가의 눈과 귀와 가슴은 서서히, 조금씩 조금씩 ‘우리’를 향해, ‘세계’를 향해, 그리고 궁극의 ‘이야기-삶’을 향해 더 크게 열렸으며 그 각각의 이야기들은 다시 서로에게 기대어 다시 커지고 깊어졌다.
그 이야기들은 말하자면,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날 갑자기(언제나/누구에게나 그렇듯),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리고 그 순간” 삶은 “예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시간에 늦는다고 말하며 그 교차로를 지나가던 그 순간”으로부터 세계/삶은 그렇게 문득,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며 부서지기 시작”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삶은 이야기가 된다.
2005년 봄부터 2009년 여름까지 쓰여진 아홉 편의 ‘이야기’ 속에는 어느 날 문득,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지는 ‘세계/나’와 거기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쪽 끝에서 무너진 그 세계가 다른 한쪽 끝과 연결되면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고, 작가는 2005년의 봄부터 2009년의 여름까지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그가 이야기하려는 삶/세계를, 작가의 기억으로 다시 되살려낸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 경험해 낸 불꽃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쉽게 위로하지 않으면서 쉽게 절망하지 않는 일이 정말 가능할까?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건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 때문이다.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피어오른, 하지만 바깥의 불꽃이 없었다면 애당초 타오르지 않았을 그런 따뜻한 불꽃. 밑줄을 긋게 만드는 밀도 높고 아름다운 문장, 우아하고도 재치 있는 농담과 유머, 그리고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진지한 문제의식은 여전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위로받는다. 그가 기억하는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이제 막 나온 새 작품집을 앞에 놓고, 앞으로 새로 쓰여지고 고쳐질 그의 첫 문장들/이야기들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이형열(알라딘 서점 대표)
www.aladdin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