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프레스노 인디언

2009-10-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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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주선으로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던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외교관계 수립이 지난주 결정됐다. 두 나라가 견원지간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세계 제1차 대전 후에 터키는 그들의 식민지하에 있던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대량 학살했다. 일설에 의하면 거의 100만명이라고 하며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아르메니아인들은 세계각처에서 디아스포라를 이루게 된다.

그들의 미국 디아스포라를 보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저 온 이 사람들의 미국정착 역사를 보면 우리의 오늘을 되새기는 기회도 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미국동부를 거처 서쪽으로 이주하며 프레스노에 정착 한다. 미국에 이민 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 같은 곳을 찾게 된다고 한다. 프레스노는 기후나 토양이 아르메니아와 비슷하다.

1881년 300여명으로 시작한 이민은 터키의 학살을 정점으로 팽창하여 1만여명으로 급작스러운 증가를 보인다. 같은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우리 이민 선배들과 나라 없는 설움도 나누었을 것이다. 그들이 캘리포니아 농업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1930년대 가주 건포도의 40%는 그들이 생산했고 무화과도 그들이 미국에 소개한 과일이다.


경제 공황 때 일부는 LA에 이주하여 그들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를 접어드는 당시 중가주 인구가 별로 없을 때 그들의 숫자는 돋보였다. 내가 이들을 처음 알게 된 70년도 어느 모임에서 이들을 ‘프레스노 인디언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이들을 비하하는 이야기로 한동안 쓰이기도 했는데 이제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는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이 주류 사회에서 받은 인종 차별도 우리나 흑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마늘을 먹는 미개한 사람들로 시작해서 유색인종한테만 사용 하던 집을 사고 팔 때의 금지조항(Restrictive Covenant)을 이들한테도 적용 하곤 했다. 이들은 보기에는 멀쩡한 백인이었는데 앵글로 문화권이 아니라 하여 백인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이들이 미국주류 사회에 완전 동화 될 때 까지 겪었던 차별대우는 만만치 않았다. 2000여년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들을 백인 교회에서 쫓아내는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있었다. 백인인 이들은 문화와 언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쉽게 주류 사회에 동화되고 있다. 이들은 이름 끝이 항상 ‘ian’이나 그런 발음으로 끝나 알아 보기가 쉽다. 주지사였던 듀크메지안과 엄청난 갑부인 커코리안도 아르메니아 사람이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듀크메지안은 뉴욕 출신이여서 프레스노인디언은 아니지만 아르메니아 후예이고 라스베가스 호텔과 한동안 파산하기 전 GM도 넘보던 억만장자인 커코리안도 아르메니아 사람으로 자기는 절대로 터키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우리보다 먼저 온 이민집단을 살펴보며 그들이 미국 주류 사회 동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되새긴다. 백인이어서 미국 동화가 쉬울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 미국에서 피부색깔이 성공의 선결 조건만은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인종의 편견을 넘고 이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지름길일 것이다.


이종혁 / 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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