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깊은 산속 옹달샘’

2009-10-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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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던 1960년대, 학교에 가면 전날 저녁에 본 TV 프로그램을 얘기하는 게 아주 중요한 아침일과였다. 우린 얘기를 통해 친구의 가족이 얼마나 진보적인가를 가늠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난 1학년 때 집에서 ‘스타 트랙’을 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그 드라마는 너무 폭력적이라 생각하셨던 것이다. 덕분에 난 친구들 사이에 멋진 친구가 될 수 없었다.

몇 십 년이 지나 대학에서 일하는 지금, 그때와 바뀐 것도 많지만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바뀐 것 중의 하나는 현재의 인기 공상과학 드라마는 케이블 프로그램인 ‘배틀스타 갈락티카(Battlestar Galactica)’라는 것이다. 하지만 출근 후 아침 커피시간에 그 드라마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건 그때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지난 주 그 드라마가 한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우린 케이블이 없어 DVD가 나오면 빌려 본다). 배우 중 한명이 한인 2세 그레이스 박인데 그가 노래를 하는 장면이었다. 첫 시리즈에서 그가 외계 우주선을 만지며 노래를 불렀을 땐 그저 아는 노래구나 하고 지나쳤었다. 이번엔 아기를 재우면서였다. 역시 가사 없이 곡만 흥얼거리는데, 지난번의 친근감이 다시 느껴져서 어떻게 배운 노래인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몇 분 후 전혀 생각지 않았던 답이 나왔다. 그랬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아, 내 아이 어릴 때의 기억이 포근하게 담긴 노래였다. 아내가 아이에게 수도 없이 불러 주었고, 한국동요 모음 테입으로도 많이 들었었다. 한국에서 일년이나 살았으면서도 외워 부를 수 있는 한국노래가 없는데(노래방의 못난 손님), 이 노래는 머릿속에 너무 깊이 새겨져 한참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곡을 부를 수 있다.

그런 노래를 미국 케이블의 공상과학 드라마에서 듣다니!

“그 노래가 한국 동요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 다음날 아침 동료들에게 말해주었다. “자네 아이튠 (iTune)에 그 노래 있지?” 한 친구가 물었다.“자네 아이튠엔 한국음악이 총집결해 있잖아”

바로 이것도 옛날과 다른 것이다. 이제 우린 웹페이지 혹은 사교 네트워크의 ‘나’외에도 사무실 컴퓨터에 저장된 음악을 나누면서‘나’로 알려지고 있다. 그 모든 것을 합친 것이 ‘나’인 것이다.

아이튠 네트워크에 참여하지 않은 동료들도 내 사무실 앞을 오가며 바하, 양희은 그리고 가야금과 해금의 국악을 들으며‘나’를 만난다.

이 음악들엔 사무실의 가족사진과 다름없이 나의 사적 감정이 담겼다. 어머님은 올갠 연주자셨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어머님이 연주하시는 바하를 들었고, 어느 겨울 강원도 산줄기를 운전하면서 양희은의‘사랑이야’를 들었고, 강동구 아파트에 살면서 국악을 들었던 기억들이 있다.

음악은 무엇보다도(미각을 빼고) 기억을 가장 잘 불러일으킨다. 한국음악은 여자친구(현 아내)와 미시간 고속도로를 달리며 행복해하던 밤을 기억나게 한다. 노래를 듣던 당시엔 가사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마음 속에서 계속 연주되는 노래가 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너무나 생생하다. 그 몇 년 후 김수철의 노래 ‘별리’임을 알게 되었다.


잠깐,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게 옳은 걸까? 이 노래들은 한국의 물건, 장소, 사람과 관련한다. 어떤 권리로 미국인의 기억 속에 이 한국노래를 담으려는가?

외국인이라도 타국의 노래에 강한 개인적 감정을 담아 ‘내 것’이라 점찍을 수 있다. 삶 속의 향수는 이런 색다른 소유권을 주장케 한다. 일종의 침해일까? 백인 교외지역 틴에이저들이 다운타운 랩 음악을 자기네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그런 잘못은 없는 걸까?

문화의 국경이 녹아내리고 있다. 문화는 점점 브랜드화 되어간다. 그러니 내 가슴에도 양희은의 목소리를 담을 권리가 있는 것 같다. 1970년대에 한국인 처남이 하루 종일 비틀즈의 ‘헤이 주드’를 틀어 놓고 큰소리로 따라 불렀다 한다. 그도 영국인이 그 노래를 ‘내 것’이라며 문제 삼으리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을 것 아닌가.

풍요하며 복잡하고 무작위적으로 혼합된 세계문화. 이것은 공상과학이 아니다. 우리의 미래다. 음악은 바로 그 첫 요소이다.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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