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뉴욕차일드센터 아시안클리닉 부실장. 임상심리치료사>
지난 번 칼럼에서 ‘아빠 상실의 시대’라는 글을 실었다. 그 후 ‘청소년 지킴이’가 주최한 부모세미나에 패널로 나갔었는데 50여 명의 참석자 중에서 12명이 아빠들이었다. 아직까지는 세미나에 참석한 엄마들 숫자가 아빠들에 비해서 훨씬 많지만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하면 괄목할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아빠들이 자녀양육에 참여하는 것이 향후 자녀들이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영국 뉴캐슬 대학의 다니엘 네틀 박사가 2008년 ‘진화와 인간행동’ 지에 발표한 연구논문에 의하면 아빠들이 자녀양육에 활발히 참여할수록 11세 이전까지의 자녀지능과 42세까지 자녀들의 사회적 지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밝혀졌다. 네틀 박사에 따르면 단순히 아빠가 자녀들과 함께 거주하는 것만으로는 자녀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한다. 즉, 자녀들이 엄마와 엄마가족들의 손에만 맡겨지는 경우에는 아빠가 없는 가정에서 자라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즉, 아빠가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느냐 보다는 아빠가 자녀양육에 의지를 가지고 참여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면 좀 아찔해진다. 자녀들과 함께 살고만 있지, 양육은 전적으로 엄마 손에만 맡겨놓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우리들은 아직도 이혼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우가 많다. 편부모 슬하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한 쪽 부모의 부재로 인해 정서 및 행동발달 측면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갖게 될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이다. 미국 부모들은 이혼한 후에도 부모들이 자녀양육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에 자녀들은 양부모 슬하에서 자라난 것과 별 차이 없이 자라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부모가 이혼했느냐 혹은 자녀가 부모와 함께 사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부모가 자녀의 양육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냐가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빠의 적극적인 양육참여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단순히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 것만으로, 꼬박 꼬박 생활비를 가져다주는 것만으로, 혹은 일 년에 한 번씩 가족여행 가는 것만으로 아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현대인의 삶이 바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구차한 변명에 의존하지 않길 바란다. 바쁜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 중에 한가롭게 살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그에 따라 역할과 책임도 변해야 한다. 아이들의 삶속에 아빠의 터치가
필요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연구결과들은 하나같이 아빠의 적극적인 양육참여가 자녀들의 삶 속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자녀와 함께 공원에 나가서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보드게임을 함께 하며, 어려운 학교 숙제와 준비물을 챙겨주며, 여행과 과외활동에 자녀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이제 아빠들의 중요한 과제이다.
최근 한국의 모 생명보험회사가 주최한 어린이 그림그리기 대회에서 출품한 가족그림들을 분석해 보았더니 하나 같이 아빠가 빠져 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혹시 가슴이 뜨끔해지는 아빠가 있다면 바로 결단을 내렸으면 한다. 자녀의 삶 속에 껍데기 아빠가 아니라 진짜 아빠로 기억되길 원한다면 오늘부터 의지를 가지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면 된다. 우리 자녀들이 바라는 아빠의 모습은 아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소박하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