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속되는 시련과 아픔(1943년 2월3일~1945년 8월9일)
강북에서 중경 시내로
1943년 2월3일 수요일
오래전부터 경영하던 이사를 오늘 하기로 했다. 아니, 아니하면 안되게 된 날이다. 집주인으로부터 ‘자기 며느리가 금방 올 터인데 어찌 하느냐?’는 걱정이 쏟아진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정부청사 건물이 소재하고 있는 ‘우스예샹’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공지를 얻어 교포 가족들이 살 수 있게 열예닐곱 개 방을 만들어 놓고 한 세대 한방씩 사용할 수 있게 지었다는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지대가 몹시 습한 곳이라 햇볕이 잘 들지 못하는 낮은 지대여서 망설이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결정한 것이다.
강북 처소는 이제 2년 여를 다정스러이 살던 다섯 세대가 뿔뿔이 헤어지게 됐다. 수일 전 이삿짐 한짐에 20원을 달라고 하더니 오늘은 20원을 줘야가겠다고 한다. 음력설을 하루 앞둔 날이어서 그렇게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오후에서야 겨우 한짐에 30원씩이나 주기로 하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30원이라고는 하지만 평소보다 거의 세 배나 되는 액수다.
1943년 2월5일 금요일
음력 정월 초하루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수백만이 살고 있는 중경의 길거리를 모두 적셔놓았다. 강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북에서 더 오밀조밀한 이곳 시내로 이사를 오니 중국에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금년 중국은 백여년 동안 열강에게 불평등 대우를 받던 무리한 조약을 모두 철폐하고 중국에게 유리한 새 조약을 한달 여 전에 성립시켰다.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음력 정월 초에는 3일간 관공사 일체 조직에서 휴가를 갖고 대경축을 실행하기로 발표했다. 오후에는 우리 애국 부인회와 청년회가 주최하는 다과회와 여흥이 있어서 교포들이 모두 모여 많이 먹고 유쾌하게 놀고 재미를 퍽 많이 보았다. 올 때에는 부인네들이 모여서 만들었던 떡도 싸가지고 왔다. 같은 교포끼리 나누는 모임들이 이곳 생활을 해나가는데 큰 활력소가 되어준다.
1943년 3월1일
아침 9시에 중경 시내 신생활 운동회 대강당에서 제24회 되는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는데 전체 교포가 회집하여 성대히 거행되었다. 퍽 성황이었는데 외국 손님으로는 오직 몇 곳의 신문기자 외에는 참가한 이가 없다고 하고 전부가 동포였는데 그 수가 이백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가 태어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삼일운동을 중국의 온 교포가 보는 앞에서 기념하는 자리였다.
1943년 3월22일
제시 엄마의 말에 의하면 오늘이 기념할 날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다. 저녁식사 후 저 멀리고 산보를 몇 시간하고 돌아왔다. 아무 것도 모르는 두 어린애들은 오래간만에 나가다니매 좋다고 한다. 어떻게 가버렸는지 모르게 가버린 인생의 푸르른 시간들이다. 심한 역경 속에서도 천진하게 자라고 있는 이 어린애들이 어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우리의 결합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1943년 3월30일
오늘은 제니의 생일날이다. 계속해서 기념일을 맞고 있다. 아부지께서는 아기 낳느라 수고했다며 나를 위로하느라고 고기 사기 힘든 중경 시내에서 어떻게 구하셨는지 염소 곰국 한 가마를 가지고 오셨다. 어찌나 많은지 온종일 실컷 먹고도 남아서 내일까지 먹을 것 같다.
1943년 5월10일
오늘 하오(오후)에는 난데없이 ‘한국은 전쟁 후에 국제 공간이 된다’는 문제로 자유한인대회가 오후 2시에 중경 근방에 있는 신운복무사 회집실에서 개최되었다. 그 회에 제시도 같이 참가했다. 회의의 경과는 순조롭게 되었으나 효과는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지내었다. 모였던 사람은 한 이백명쯤 될까?
1943년 7월10일
제시 자매는 삼사 일째 기츰을 하며 괴로워한다. 엄마는 빨래를 하시기에 분주하셨고 두 형제는 집에서 잘 놀고 있다. 엄마는 빨래를 다 하고는 틈을 타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계시다. 중경이란 도시에는 쥐도 전쟁으로 피난 온 모양인지 전쟁 후부터 쥐가 극성을 부린다고 한다. 이곳 쥐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을뿐더러 대항을 하여 쥐에게 물린 젊은이들도 여럿 있다. 중경을 ‘쥐의 도시’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제시 자매의 신분증을 해왔는데 제시는 주민번호가 효자제 010880, 제니는 010879이다.
헤어진 가족
1943년 9월28일
오랫동안 경영하던 일인 어머니의 요양 문제는 그새 아무러한 해결책도 찾지 못하다가 산치(삼계진)에서 개업하고 계신 임의택 의사가 중경에 다니러 온 것을 기회로 간단히 해결이 됐다. 산치는 기강에서 좀 더 들어가는 외진 시골로 그곳에서 과수원을 겸하며 진료활동을 하고 있는 임 선생님의 집에는 빈방이 많다고 하며 당분간 그곳서 휴양할 것을 적극 권유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제니만을 데리고 가서 시골 공기 맑은 곳에서 몇 달 지내기로 의논하고 임의택 선생
과 함께 떠나게 됐다. 그리고 지난 26일부터 행리를 수습하여 가지고 정거장에 가서 기다리기를 삼일 째. 오늘에야 오후 2시40분에 간신히 자동차 제5호석 하나를 얻어 타고 성긴 빗방울이 휘날리는 하오에 임 의사 아저씨와 같이 남쪽으로 멀어져 있는 신작로를 향해 기적소리와 같이 떠나버렸다.
1943년 10월6일 수요일
오늘 아침에서야 임 의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9월30일에야 기강에 무사히 도착되었다고 한다. 중경서 기강엔 길어야 네 시간 반이면 도착되는 거리인데 3일 만에야 갔다고 하니 전시라 모든 것이 순조롭지 못한 모양이다. 중간에 무슨 고장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제시와 엄마가 많이 고생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길 가운데서 두 저녁을 지냈으니 그 얼마나 고생이 되었으랴! 생각할수록 가엽기만 하다.
1943년 11월23일 화요일
음력으로 소설이다. 절기 추위를 타노라고인지 며칠 동안 괴롭게 춥더니 이삼 일간은 태양도 때로 비치어 조금 날씨가 풀리는 듯하다. 어머니의 편지가 왔다. 제시의 겨울옷이 상자 속에 들어있으니 찾아 입히라는 부탁에 따라 자켓, 장갑, 모자들을 찾아 입혔다. 수백리 박에 가 계시는 엄마가 이처럼 고맙게 생각해주신다고 제시는 좋아하고 뛰며 기뻐한다. 오늘 엄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엄마의 요양은 차도가 있다고 하니 속히 집으로 돌아오셨으면 좋을 것이라고 편지에 썼다. 언제나 오려는지…
1944년 2월4일
산치에서의 요양생활을 끝내고 돌아왔다. 오후 세시쯤 제니를 데리고 두어 날 비가 내려 질벅거리는 길을 걸어 중경 처소로 돌아오니 제시는 기쁨이 얼굴에 가득 차서 마마를 부르며 즐거워한다. 회의가 있어 가셨던 빠빠께서도 소식을 듣고 오셨다. 제시는 제 동생 주겠다며 준비해뒀던 과자를 끄집어내어 제니를 주며 좋아한다. 그러나 제니는 그새 낯이 설어 서먹서먹거리며 있다가 저녁때가 지나니 ‘우리 집으로 가자’고 울며 야단법삭을 하여 온 가족이 어쩔 줄을 몰랐다.
아버지의 ‘엄마’ 되기
1944년 4월10일 월요일
중경시 남안 인제의원에 입원하고 계신 어머니는 오늘 수술을 한다고 하더니 내일로 연기됐다고 한다. 제니는 입원 기간 동안 엄마를 떨어져 지내기 어려우리라 생각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엄마를 찾지 않고 언니와 잘 놀고 있다. 엄마 없이 지내는 두 자매에 대한 측은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괴로운 일이 올 때에는 첩첩이 온다 하더니 엄마는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가시고 제시는 삼사
일 전부터 턱밑 임파선이 부어서 약물찜을 하고 있다.
1944년 4월11일 화요일
오늘은 의정원과 임시정부 성립 제25주년 기념일이라고 한다. 오전 10시에는 어머니가 예정대로 인제의원에서 미국 의사 Dr. Allen의 지도하에 몇몇 의사와 간호사들에 의해 큰 수술을 받았다. 작년 4월28일 남안에 사시는 Dr. 한에게 받은 수술보다는 큰 것인가 보다.
1944년 4월29일 금요일
어머니께서는 수술 후 그러니깐 18일째가 되는 날인 오늘 아침 퇴원하여 집으로 오셨다. 병원수속을 다 치르고 데려오신 최창석씨와 같이 집으로 오셨다. 이번에도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나를 대신해서 수고를 많이 해주신다. 오랜만에 아빠와 제시, 제니 두 사랑스런 얼굴을 대하는 엄마는 몹시 기뻐한다. 고깃국과 맛난 반찬들을 준비해놓고 기다리던 식구들은 모여앉아 모처럼 다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드디어 가족이 모두 집에 모여 있다. 한자리에 모여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 우리 가족에겐 너무도 소중한 일이다.
1944년 4월29일 토요일
둘째 딸 제니는 신색이 몹시 좋지 않을뿐더러 소화되지 않은 변을 보았다고 하더니 지난밤엔 열이 올라 신음을 하고 새벽녘엔 또 귀가 아프라고 하여 귀밑을 만져보니 좀 부은 듯하다. 걱정이 되어 불을 피우고 물찜질을 해보았으나 아직 확실한 병증을 할 수 없다. 아침에 열이 좀 내렸으나 그저 괴로워하고 음식은 먹지를 않는다.
근심 어른 손님, 병마가 머무르다
1944년 5월14일 일요일
제시가 학교엘 가는 날이다. 임시 정부에서 한교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글과 우리나라 역사, 그리고 민족혼을 심어주는 주말 임시학교다. 제시는 학교에 가겠다고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분주하더니 여러 날 전부터 부탁하던 속바지를
찾아서 주자 그렇게 좋아한다. 몇 주일 동안 제시는 매일 습자에 백점을 맞아왔는데 오늘은 지난 주일보다 더 잘 썼는데도 중간에 학교가 그만두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풀데 없는 화증을 내고 있다. 한글공부를 열심히 해주는 제시가 기특하다.
1945년 1월1일
원단은 무한한 희망과 행복을 가득 싣고 식구의 4분의3이 병마로 누워있는 우리 집에도 찾아왔다. 수술을 받은 어머니는 별 괴로움 없이 잘 지내시고 제시와 제니의 홍역도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되고 있다. 제니는 언니보다 하루 일찍 발진이 시작되어서인지 얼굴이 더 안돼 보인다. 고집스럽고 주장 강한 똘똘한 얼굴이 반쪽이 됐다.
1945년 2월2일
제시 자매는 거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런데 엄마의 지난 번 수술을 완치되었다고 하더니 그 부근이 다시 성종이 되어 시립병원에 다니고 있다가 의사인 춘곡 임의택 선생과 최성오 선생, 두 분의 손을 빌어 오후 2시20분에 다시 4차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저녁까지 경과는 대단히 좋았다. 그러나 밤이 되니 어머니의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괴로운 무양이다. 그래도 새벽이 밝아오니 좀 잠잠해지고 있다.
1945년 5월1일
메이데이, 노동절이 오늘이다. 오늘을 계기로 해서 오랫동안 운동 중에 있던 우리 광복군이 오늘부터는 완전히 ‘한국광복군’으로 되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령부 안에는 상하직원이 거의 다 우리 사람으로 개편되고 필요한 기술자로 중국 사람도 얼마가 있다고 한다. 아버지도 오늘부터 광복군에 취직이 되신 모양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집안 일을 거들어 줄 시간이 적을 것을 근심하신다.
1945년 6월2일
정오의 실내온도가 97도로 계속 더위가 극성을 부리고 있고 비는 오지를 않아 농터에 곡식물들은 거의 말라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금년엔 밀이 풍년이라 하여 시장에 가서 알아보니 소두 한말에 5,000원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네 교포들은 거의 생활의 여유를 가질 수 없는 형편이라 더욱이 걱정이 된다. 소금, 장, 숯 사는 것을 다 그만두고도 매일 지갑에 5백원을 가져야 살아가겠다고 예산해본다. 그것도 언제까지나 버티게 될지 모른다고 걱정이다.
1945년 8월9일
8월이 도착되었다. 오후 한 시에 오랫동안 문제로 걸려 있던 일소전쟁에서 소련이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세상은 미칠 듯이 좋아한다.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명이 된 미국의 원자폭탄, 한 개가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지자 땅 덩어리 3분의1이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한국 독립당 간부들과 함께(1940,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제시 아버지 양우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