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해받는 우리말 표현

2009-06-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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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한 한인 인터넷 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하소연이 실려 있었다.

“…메릴랜드에 사는 30살의 남자입니다. … 작년에 8살 난 아들을 혼내는 과정에서 ‘또 거짓말하면 너 죽고 나죽어!’ 라고 했는데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있는 가정상담에서 그 말을 아들이 직역으로 말해 버렸습니다. …그 날로 경찰이 찾아와 저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아마 가정법원이 죽인다는 말을 쓰는 이 남자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가족과의 접촉을 금 지 조치하는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우리가 너무나 흔히 쓰고 있는 표현인 ‘죽인다’는 말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kill’ 이라는 뜻으로 전달되어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죽인다’는 말은 아주 흔히 그냥 혼내주겠다는 뜻, 내지는 그냥 두지 않겠다는 정도의 의사표시로 쓰는 데 불구하고 이를 영어로 전달하면서 ‘I will kill you!’ 로 번역해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술 취한 중년의 한인 남녀가 심한 언쟁 끝에 주먹이 오가는 싸움으로 발전하자 술에 취해 있었던 여인이 도망가려고 방에서 창문으로 뛰어 내리려고 창틀에 매달렸던 사건이 있었다.

심문에서 영어가 능통하지 못한 여인이 “그 남자가 ‘I will kill you’ 하며 주먹질을 하기 때문에 창문으로 뛰어 내리려 했다”고 실토하게 되어 경찰은 영어로 ‘kill’ 하려 했다는 말과 2층에서 뛰어내릴 정도의 급박한 사정 등의 정황을 고려해 이 남자를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해 버렸다.

술 취한 남자가 주먹으로 쥐어박을 정도의 화가 나서 지른 소리인데 이런 식으로 영어로 말해 버렸기 때문에 심각한 법적 문제로 비화해 버린 것이다.

위의 두 사건에서 보듯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화가 나면 흔히 하는 말로 ‘죽인다’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 말이 결코 사전식 번역으로 영어의 ‘kill’ 이란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닌 것은 한국인은 누구든지 알고 있다. 하지만 영어의 ‘kill’ 이라는 말로 듣는 미국인의 인식으로는 그야말로 살해한다는 뜻으로 알아듣기 때문에 법적 문제가 될 경우에는 엄청난 문제로 비약하게 된다.
몇 해 전에 내가 통역을 맡은 한 형사 재판과정에서 한 증인이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어서 이를 ‘kill’ 이라고 한다면 분명 오해를 불러 올 소지가 있어 어떻게 하면 그 말의 진의에 가장 가깝게 통역할 수 있을까 하는 난감한 문제에 부닥친 일이 있었다.

법정통역의 입장에서 한국말로 ‘죽인다’고 한 말을 단어에서 단어로의 번역으로 “I will kill you” 라고 한다면 이는 적절한 통역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통역의 역할은 표현하는 그대로를 통역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표현으로 통역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말은 단어에서 단어를 사전식으로 번역한다면 영어의 ‘kill’ 이란 말이지만 한국인의 언어 풍습 상으로 ‘혼 내준다’ ‘그냥 두지 않겠다’ 정도의 표현이라고 설명을 붙이는 것도 원칙상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엄청난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통역인은 판사에게 양해를 얻어 이런 설명을 부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이해를 얻어낸 일이 있었다. 사실은 이 말을 한 사람의 변호인이 그 분명한 의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고 법원을 설득해야 한다.


몇 해 전에는 남부 지역에 살던 어느 한인 부인이 집에 혼자 있던 아이가 장롱이 넘어지는데 깔려 죽은 사건이 있었다. 슬픔에 쌓인 엄마의 넋두리로 “내가 너를 죽였다”하며 몸부림치며 울자 그 말을 그대로 믿은 경찰이 이 여인을 살인혐의로 체포한 사건도 있었다.

이런 표현의 차이는 어느 언어에도 있을 것이고 문화가 다른 어느 종족이라도 똑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런 오해가 발생했을 경우를 대비해 법정에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분명한 설득을 해야 하는 하는 것은 변호인의 몫이다.

박중돈 / 법정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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