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어를 기다리며

2009-05-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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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핸 숫제 봄을 만나질 못했다. 앞마당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걸 설핏 본 듯도 한데 한밤 자고 나니 바람결에 다 날아가 버렸다. 어쩌면 밤새 내린 비에 다 씻겨갔는지도 모른다. 봄은 사랑의 징표도, 그리움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훌쩍 떠나고 말았다. 분주한 일상에 넋 놓고 살아가는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봄을 놓친 셈이다.

“참 세월 빠르지요. 꽃 피는 살구나무 아래 앉아 문득 고개 들었더니 서른이었고, 나무아래 아이들이랑 살구 줍다가 일어섰더니 마흔이었고, 날리는 꽃 아이들 웃음소리에 뒤돌아보았더니 쉰이었습니다…”라고 읊은 섬진강 김용택 시인의 노래가 내 고백이 되었다.

“김형, 늦봄 보내러 산에 가지 않겠소? 산에 올라 흐르는 내에 발 담그고, 나무숲 솔향에 취해보면 세월 흐르는 소리가 사각사각 납니다. 떠나가는 봄 마중도 않고 어찌 무심히 나이만 먹겠소? 이젠 우리도 가는 세월 자락마다 삶의 노래를 한 아름 감사의 꽃다발로 엮어 안겨 보내야 할 때가 되었소.”


K선배님의 전화가 고맙다. 자연을 좋아해 수시로 산행하며, 바다나 강 낚시를 즐기시는 두 내외가 내 마음을 아셨는지 동행하길 권하신다.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 고개 넘어 바로 태평양 바다이고, 도시를 벗어난 게 얼마 안 되는데 이렇게 깊은 숲이 있는 줄 몰랐다. 봄을 보내는 숲은 꽃들이 분분히 흩날리고 초록빛 잎사귀들이 더욱 촉촉해져간다.

나무 그늘 사이로 내가 졸졸 흐른다. 지난주 내린 비로 물이 제법 불었다. “이 내는 이맘 때 바다에서 연어가 올라오는 모천이라오. 코호(coho)도 있고, 제일 작은 핑크 종도 있지요. 매년 숫자가 줄어 안타깝지만, 연어의 귀향을 보러 이곳에 옵니다.”

모천에서 부화한 치어들은 바다로 내려간다. 한 어미가 낳은 수천, 수만 개 알에서 살아남는 건 고작 열 마리도 안 된다고 한다. 수명이 4~5년 되는 성어들은 알래스카까지 1,000마일을 헤엄칠 만큼 강하다. 산란 때면, 신통하게도 모천을 찾아 올라온다.

“김형, 연어들이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오는지 아시오? 냄새로 안다오. 소위 후각기억장치가 유전자 속에 녹아 있다는 게요. 내 아들 녀석도 부모 품 냄새를 맡고 올라오고 있을 게요. 그 놈도 연어처럼 큰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강인한 효자였으니까…” 지난 봄, 뜻하지 않게 산악자전거 사고로 세상 뜬 큰아드님을 그리워하는 말씀에 마음이 저민다.

허나 갓 40인 건장한 아들을 잃은 참척의 슬픔을 당하셨음에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그 의연함이 존경스럽다. “사랑하는 아들은 내 가슴에 살아 있소. 함께 살았던 세월들도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소. 연어가 고향으로 올라오듯, 아들도 천국 본향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고 있소. 연어를 기다림은 아들을 기다림이지요. 그 녀석은 틀림없이 내 체취를 알고 찾아 올 테니까…”

김희봉
수필가·환경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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