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리 큰 게 빨리 죽는다

2009-05-1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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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하얀 벽시계가 단돈 5달러. 서재로 쓰는 방에 마침 벽시계가 없던 터여서 냉큼 하나 집어 들었다. 배터리를 넣어 벽에 걸었다. ‘째깍 째깍’ 시계가 세월 가는 소리를 요란하게 알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이렇게 큰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째깍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도 처음이다. 밤이 깊어 세상 소리가 잦아들자 째깍 소리는 정적을 깨며 침실까지 스며들어 왔다. 도저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싼 게 비지떡’인데 싼 맛에 공연히 돈 버렸구나 싶었다. 누구에게 거저 주기도 그렇고 멀쩡한(?) 새 시계를 내다버리자니 그도 아까웠다. 소리 큰 시계를 유배시키기 위해 2층 집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마땅한 유배처를 찾아냈다. 아래층 화장실이다. 화장실 벽에 시계를 걸어 놓고 문을 닫아버리니 잠잠해졌다.

유배된 벽시계는 출근 전 화장실에서 아침에 배달된 한국일보를 읽는 버릇이 있는 나에게 늦지 않도록 큰 소리로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석 달쯤 지난 어느 날 시계가 죽어버렸다.

집안 다른 벽시계들은 배터리를 한번 넣으면 보통 이삼년은 거뜬히 버티는데 소리 큰 시계는 수명이 짧았다. 27년 된 전자 손목시계 하나는 구석에 처박아 두어도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요즘 다시 차고 다니는데 지금까지 배터리를 세 번 밖에 갈지 않았다. 이 액정 시계는 숫자로 시간을 알려줄 뿐 째깍 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다. 몸집 줄여 조용히 살면 장수하는 법이다.

소리 큰 벽시계의 배터리를 갈아주었다. 이번엔 두 달을 겨우 버티더니 서버렸다. 세 번째는 달포 만에 요절했다. 아무래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것 같아 쓰레기통에 장사 지내 주었다. 빈 수레처럼 소리만 요란한 시계였다.

한정된 귀한 에너지를 소음 생산에 허비하면 빨리 죽는 게 당연하다. 시계의 사명은 ‘째깍’소리를 내는데 있지 않다. 배터리가 시계의 밥이고 보면 째깍 소리는 시계가 비싼 밥 먹고 내는 헛소리이다.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소음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극소화시켜야 시계가 오래 산다.

집 안에 있는 벽시계 다섯 개의 배터리 수명도 째깍 소리의 크기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시계의 수명과 품질은 소리의 크기에 반비례 하는 게 분명하다. 오래 사는 놈은 귀를 바싹 대어도 소리가 들릴 듯 말듯했다. 어디 시계뿐이랴. 인간도 마찬가지다.

흔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오래 살기는 틀린 것 같다. 목소리가 커서 항상 이익을 더 챙기고 안 될 일도 되게 만들어 기고만장할지 모르지만 큰 소리는 만수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 큰 소리는 정력 낭비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감정격화로 건강을 해친다. 큰 소리는 스스로 “나는 빈 수레요, 소음과 같은 존재요, 단명합니다 하는 고백과 다름없다.

생명 같은 소중한 시간을 축내가며 소음을 만들어 세상을 시끄럽게 하다니…. 장수하는 사람들의 비결을 들어보면 하나 같이 큰 소리 안내고 조용히 산 사람들이다. 큰 소리 치는 사람들은 소리 큰 벽시계가 주는 교훈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소리 큰 게 빨리 죽는다.


황시엽/ WA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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