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만났을 때…
1897년 태어난 양우조 선생은 1915년 중국으로 향한다. 더 큰 세계를 보겠다는 꿈을 가졌던 그에게 상해의 교포사회는 미국행 배편과 그곳에 사는 교포의 주소를 알려준다. 단신으로 미국에 간 그는 신대륙에 도착하긴 했지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언어도, 생활비도 그의 손에 쥐어진 건 없었다. 19세의 나이에 미국 인디애나주 사우스밴드에서 초등학교
과정부터 다시 시작한 그는 항구 노동일과 겨울방학엔 알래스카 탄광, 여름방학엔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기 위해 험한 일을 찾아다녀야 했다. 어린 학생들과 함께 중학교를 거쳐 빠른 속도로 미국인들의 학제를 하나씩 거쳐나가던 그는 어느 날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만남을 갖게 된다.
한국에 다녀온 미국 선교사의 강연회에서 미국인들에겐 이름조차 낯선 나라인 조선을 설명하려고 지도에서 일본을 보여주고 그 옆의 작은 나라라고 설명하자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몇몇 생긴 그의 고국은 미국인들에게 그저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숨어있는 나라였다. 강연회장에서 접한 고국의 소식은 설레임에 부풀었던 젊은이를 낙담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뿐 아니라 조국 동포들에 대한 너무도 비참한 이야기를 들은 젊은이는 가슴 아픈 동포애를 갖게 된다. 무엇보다 옷 하나도 제대로 없어 헐벗은 채 살아간다는 동포들을 위해 젊은이는 내 손으로 동포들을 입혀보자는 꿈을 갖고 ‘방직 공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그후 거듭된 의논 끝에 그는 고국에 큰 규모의 방직회사를 만들겠다는 꿈을 세우며 친구 ‘최희송’에게 면방직 공부를 권하고 당신은 마방직을, 친구 ‘오정수’에게는 공장을 가동시킬 전기학을, ‘오천석’에게는 교육학을 권하여 공장운영은 물론, 직원 자녀들을 교육시킬 것까지 생각하게 된다.
1926년 그는 계획대로 MIT 공대를 거쳐 매사추세츠 뉴베드포트 공과대학과 1928년 폴리버 공과대학을 졸업한다. 개교 이후 동양인으로는 최초의 졸업생이자 우등 졸업생 기록도 남긴다. 1916년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 후 10년 만에 손에 쥔 졸업장이었다. 전국적인 방직공장 가동을 꿈꾸며 그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 대학 졸업 후 무역업에 손을 댔다. 그리고 큰돈을 벌기도 했다. 꿈을 이룰 준비가 됐다는 희망에 부풀었던 젊은이들은 마침내 조국행 배를 탄다. 그 돈을 가지고 부산항으로 들어오게 된 그는 사전에 전국 각지에 인맥을 동원해 공장 부지를 찾는 조사를 한 것이 일본 경찰에 발각돼 독립운동을 하러 왔다는 의심을 사면서 부산 지역을 벗어날 수 없도록 철저한 감시를 받는다. 설상가상 장티푸스에 걸려 투병생
활을 하던 중 계획을 변경한다.
’산업을 일으키려면, 헐벗은 동포들을 먹고 입히려면 우선 독립해야 한다!‘
나라의 독립을 우선 떠올린 그는 1928년 일본 경찰의 감시 하에 은밀히 중국 상하이로 돌아온다. 조국의 산업부흥을 꿈꿨던 젊은이가 이제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재상해 한국 독립당’ 창당 발기인의 하나로 임시정부 중국 화남 및 남양군도 신찰 특파원으로 파견된다. 1930년에는 중국 화남 지역 한국 유학생회 지도고문으로 임명됐고 중국 광동성 정부의 ‘건설청 공업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생계를 이어가면서 ‘혁신사’란 출판사를 만들어 주필로 활약한다.
그 와중에서 서적들이 국내에 배포된 경로를 조사하던 일경에게 발각되어 본국에서 한글 활자를 구해 보내던 그의 조카와 친형제가 체포되어 악형을 당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독립 쟁취를 위해 알아야 할 서구 사상집들을 번역하고 정리하면서 한편으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재무부 화남 특파원으로 임시정부의 자금을 모으고 유학을 꿈꾸는 젊은이를 지원해 외국에 보내는 업무를 맡던 그는 일기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필자인 부인을 만난다.
임시정부 요원이요, 독립운동가 남편을 맞이했던 부인의 이름은 최선화. 힘든 외국생활도 그녀에겐 새로운 도전이요, 그리 심한 고생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1911년생으로 정의여자 보통학교,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그녀는 졸업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던 신여성이었다. 학교 선배이자 이화여전 가사과 창립자인 김합라 교수의 소개로 서울에 잠깐 들른 소벽(당시의 이름)과 만난 이후 중국에 들어간 그와 편지로 계속 사귀다가 결혼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들어간다. 당시 소벽은 독립운동가임을 감추려고 ‘이춘삼’이라는 가짜 중국인 증명서를 갖고 다니며 중국인 행세를 할 만큼 신분위장을 위해 고전분투하고 있던 때라 그들의 만남은 물론, 결혼을 결심한 그녀에게도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우선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상해 간호 전문학교로부터 정식 입학 허가서를 받는다. 1936년 중국에 간 그녀는 반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이듬해 김구 선생 주례로 임시정부 식구들을 초대한 단출한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식 후 그녀는 남편 소벽이 활동하는 광주에서 살림을 시작한다.늘 중국에 있는 조선인의 거동을 감시해 오던 일본 정부는 그녀가 자퇴와 함께 행방이 묘연해지자 그녀를 찾아 나섰고 일제하의 조국에 망명하여 애국활동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고향 친정 동생이 대신 감옥에 들어가는 수모도 겪는다. 부인의 나이 스물여덟, 남편의 나이 마흔 둘, 중일전쟁으로 화염의 연기가 자욱한 중국 땅에서였다.
아기 제시의 탄생
1938년 7월4일 중국 호남성 장사
제시가 내게 온 것은 바로 오늘, 음력으로 6월7일 아침이다. 정확히 말해서 오전 열시 정각이었다. 내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나는 내 딸을 가슴에 안았다. ‘상해’에서 시작된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점차 정세가 중국에 불리해지자 중국 정부가 자리하던 남경 근처 ‘진강’으로, 얼마 후 다시 지금의 ‘장사’로 자리를 옮겼다.
제시는 중국 호남성 장사시 북문 밖의 장춘항에 위치한 이태리 천주교당 의원에서 이태리 의사 한 명, 이태리 수녀 간호사 한 명, 블란서 수녀 간호사들의 도움으로 태어났다. 순산이었다.
건강하게 뱃속을 나온 지 두 세 시간 후부터는 사지를 마음대로 놀리며 손가락을 빨고 있다. 어지러운 타국에서 건강하게 태어난 것만도 감사한데 아기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열심히 생명의 몸짓을 하고 있다. 아기의 이름은 ‘제시’라고 지었다. 집안의 돌림자가 ‘제’자인데 ‘제시’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영어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기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제몫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아기 또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사
이에서 능력 있는 한국인으로 활약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었다.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한다. 우리 제시!
1938년 7월15일 호남성 장사
산모의 건강은 의외로 양호하다. 먹을 것 넉넉지 않고, 쉴 곳 여유롭지 않은 이곳에서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피하기 어려운 시국 관계로 오늘 아침엔 퇴원했다. 이제 우리 아기의 고향은 평양도, 서울도 아닌 중국의 ‘장사’가 됐다. 이곳에서 우리 제시의 역사 또한 시작되고 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이 타향살이가 언제쯤 끝나게 될까? 제시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1938년 7월22일 광동성 광부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몰리고 있다. 제시가 태어났던 ‘장사’를 뒤로 하고 모든 임정 식구들은 광주행 월한철로 전차를 탔다. ‘장사’에서 ‘광주’까지, 제시를 낳은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엄마보다 아기가 더 걱정이었다. 갓 만난 세상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부대끼는 기차를 타고 피난을 떠났으니 위생적인 환경은 제쳐두고라도 흔들리는 기차로 사흘이나 여행을 했으니… 더운 열대지방이라 줄곧 안기 힘들어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를 준비해 그 속에 아기를 뉘어 들고 다녔다.
기차를 타고 가던 중에는 갑작스런 일본기의 공습도 만났다. 공습이 오면 기차가 멈췄고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려 주변의 수풀에 숨어 적기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대광주리에 누워있던 제시에게는 혹시 수풀 속의 벌레라도 붙을까봐 수건으로 덮어줬다. 바구니 속의 아기를 들고 있는 나, 바구니 속에서 답답한 숨을 쉬고 있을 아이,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옆에 엎드려 있는 아주머니… 모두들 숨죽이며 숨었가 저만치 비행기가 사라지면 다시 기차에 올랐고 기차는 다시 숨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기차는 그렇게 멈췄다 섰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수풀 속에서, 시냇가에서, 나무 밑에서 가만히 몸을 눕혔다. 공습이 지나고 나면 흘러가는 물에 세수도 하고 목을 축이기도 했다. 기차가 도중에 도시를 지나게 되면 우리 한교들은 각 가족당 배급 받은 돈으로 나가서 먹을 것을 사왔다. 그렇게 사흘이란 피난 여정이 끝나고 7월22일 광주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광주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또 공습을 당했다. 황황히 임정 대가족의 숙소로 정해진 ‘동산 아세아 여점’으로 찾아들어갔다. 피난의 시간들도 지나고 나니 더운 날씨와 공습 비행기의 기억만이 남았다. 이런 생각도 잠시일 뿐, 바구니 속의 제시를 보니 신기하게도 편안하게 먹고 자고 울 뿐이었다.
1938년 8월30일 광동성 광주(제시 엄마의 글)
오늘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고 정면으로 제시를 안아줬다. 언제부터인지 제시는 스스로 머리와 목을 바로 세우고 있다. 이 세상에 나온 지 고작 두 달 정도지만 벌써 자기 몸 간수를 단단히 하고 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아기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난다. 육남매를 낳고 나와 동생들이 아플 때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애타하시던 어머니. 먼 이국땅에서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는 이 딸을 아시는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새삼 새로운 날이다.
독립운동가 부부로 첫딸 제시의 육아일기를 통해 당시 독립운동사를 후세대 남긴 양우조·최선화 부부와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