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제시의 일기 (1) 나라 잃은 어린 나그네

2009-04-13 (월)
크게 작게

▶ 내일의 희망.가족의 소중함 일깨워

이달 13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는다. 이와 때를 같이 해 뉴욕한국일보는 독립운동가였던 양우조·최선화 부부가 중일전쟁 당시 기록한 첫딸 제시의 육아일기를 통해 당시 한국과 주변국가와의 관계 등을 포함한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2년 전 미국판 한국 역사교과서 왜곡 논란을 일으켰던 ‘요코 이야기’의 대안도서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제시의 일기’ 일부를 요약해 싣는 동시에 이 책의 가치와 의미 등도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 추천의 글

‘제시의 일기’의 가치와 의미


이 책은 임시정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양우조·최선화 부부가 중일전쟁의 전란 속에서 중국 대륙 각지로 이동해 다니면 쓴 육아일기다. 일기는 1938년 7월4일 중국 호남성 장사에서 맏딸 제시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부부의 육필원고를 정리해서 ‘제시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묶은 이는 그들의 외손녀이자 제시의 딸인 김현주(샌프란시스코)씨다.

이 책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책 중 독립운동가가 직접 서술한 유일한 육아일기이자 가족사이다. 이 책에는 제시와 제니 두 딸의 성장과정은 물론이고 정으로 뭉쳐진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의 생활사, 그리고 일본의 공습을 받으며 장사, 광주, 유쥬, 기강을 거쳐 중경으로 이동한 경로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역사적인 사실과 함께 이국땅에서 조국을 그리는 독립 운동가들의 마음과 당대 국제 정세에 민감한 안목 또한 입체적으로 들어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거창하고 거칠게 느껴졌던 독립운동가의 삶을 개인적인 이야기로 따뜻하게 나누어준다.

우리가 지금 이 책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진실성의 가치이다. 이 책에서 양우조 선생의 가족과 임시정부 공동체가 겪는 이야기는 모두 그분들이 생명에 위협을 느껴가면서 몸으로 겪어낸 순간들을 기록한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
둘째, 정처 없이 타국을 떠도는 가운데에서도 가족과 공동체의 소중함을 우선으로 지켰던 그분들의 삶은 물질적인 풍요와 정치적 자유 속에서 오히려 가족은 해체되고 공동체는 잊혀져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이기적인 삶을 반성하게 하는 힘이 있다.

셋째, 조국의 도립이라는 시대적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일상적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균형을 잡아가는 양우조 선생의 모습은 우리에게 개인적 삶과 사회적 소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 이유라는 것을 보여주며 이 시대 우리에게 롤 모델을 제시한다. 넷째, 이 책에서 양우조 선생의 삶은 민족과 국가에 헌신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민족주의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사해동포주의로 확장되어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군에 끊임없이 공습을 받으며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그의 글에는 그들을 향한 감정적 미움이 들어있지 않다.

그와 반면에 임시정부를 도왔던 현지 중국인들에 대한 감사와 미국에서 십시일반 독립자금을 모아주었던 동포들에 대한 고마움이 간간히 눈에 띈다. 조국을 잃고 타국에서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독립운동가들, 이제 그분들의 이야기를 우리 다음 세대와 나누고 또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 어쩌면 그것이 풍요와 자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분들의 위대했던 삶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길이지도 모른다.

이혜경(국민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전공 교수)

■60년 전의 일기를 펼치며


배려심 많고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
낡은 일기장 속 고스란히 담겨있어

90세를 바라보는 나의 할머니는 조간신문은 물론,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모든 뉴스를 빠짐없이 보신다. 내가 기억하는 한 늘 한결 같으셨으니 적어도 20년이 넘는 습관이다. 가끔은 본 것을 또 보고, 들은 것을 또 듣는다고 핀잔도 드리지만 늘 당신은 가장 중요한 하루의 일과처럼 빠지지 않고 되풀이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기예보는 빠뜨리지 않는 메뉴다. 혹시 뉴스라도 놓치시는 날에는 전화기를 들고 ‘131’을 눌러 일기예보를 확인하신다. 그리고 매번 자식과 손주들에게 알려주시는 그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하루를 경영하는데 날씨가 그렇게도 중요할까?’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다.

공습이 계속 이어지던 1940년대 초 할머니의 삶이 그려졌던 중국 상황에서 하루의 날씨는 그날의 공습 여부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생명이 달린 일이었으며 모든 계획이 그날의 날씨에 따라 결정지어졌다. 날씨를 확인한 후에야 하루가 시작되던 할머니의 젊은 날 습관은 60여년이 지난 뒤 세대가 바뀐 오늘에까지 이어져 온 것이었다. 낡은 일기가 내게 가져온 작은 깨달음의 일부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내게 이 일기와 일기가 들어있었던 유물가방 뿐이었다. 낡은 물건 하나하나를 살펴본 후에 느꼈던 할아버지는 섬세하고 다정한 분이셨다. 세세하게 적어 놓은 일기와 수첩 속의 필적들. 그러나 그 험난한 시대에 힘든 삶을 스스로 선택했던 할아버지의 일생은 결코 온화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것으로 옳다고 생각한 일에 투철하게 자신을 던지고 살았던 시간들이었다. 미국 유학시절 알래스카 탄광에서 일하다가 찢기셨다는 비뚤어진 오른쪽 손가락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시면서 절대 미국인들 밑에서 그릇 닦기는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하셨고 타국에서의 긴 여행 같았던 삶을 끝내고 고국에 돌아온 후에는 어쩌다 영양보충을 위해 집에서 불고기라도 구우려하면 못 먹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냄새를 피우며 고기를 굽느냐며 만류하셨던 분이었다.

자신을 존중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너와 내가 함께 사는 지혜를 알고 계셨던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분의 삶을 일기장 한권과 함께 남기셨다. 하지만 이 손녀의 삶에 그것은 단지 할아버지의 흔적으로서가 아닌 글로 옮길 수 없는 감동과 삶에 대한 용기와 지혜가 되었다. 끊임없이 소원하고 노력하던 삶의 전선에서 한발 물러선 노장의 몸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시는 할머니.시대의 유산으로 물려주고만 남북의 분단을 가슴 아파하시며 가셨다는 할아버지. 자꾸 잊혀져가는 모든 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나는 이 일기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을 내어 놓는 지금, 맨 처음 내가 이 오래된 일기장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느꼈던 그 느낌처럼 누군가 이 책을 덮는 순간 언제 어디서고 어떤 상황에 직면하든 해낼 수 있다는 의지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었던 삶을, 그리고 그 자식으로 이어가며 핏속에 흐르는 그 의지와 희망을 떠올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1999년 김현주


■ 자랑스런 한국 바로 알려지길

수잔나 박(PAAHE 대표)

3년 전 만들어진 PAAHE(파헤·Parents Association for Asian History Education)는 한국의 역사오 문화를 공·사립학교 교사를 통해 유치원~12학년 학생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하는 조직이다.12세 때인 1974년 부모와 함께 미국에 이민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평범하게 살던 나의 인생은 3년 전에 바뀌었다. 바로 딸(허보은 양)이 학교에서 ‘요코 이야기(So Far From the Bamboo Grove)’를 배우지 않겠다고 거부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이 책이 20년 동안 수많은 미국 학생들이 한국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갖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한인학생들이 이 책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수년 전 ‘요코 이야기’를 가르치는 동안 어린 한인 남학생이 사라져 학교
가 발칵 뒤집힌 사건도 있었다. 교사들이 학교를 2시간동안 찾다가 마침내 아이가 도서실 책상 밑에 숨어 울고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 부모의 말로는 책에 표현된 한국인의 모습이 너무 무서워 숨었다고 한다.
그 학교는 지금도 ‘요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PAAHE 일을 시작하면서 내게 감동을 준 ‘Korea Academy for Educators’는 미국 교사들에게 한국을 가르치는 조직이다.

‘Korea Academy for Educators’의 카너 회장은 올해 70세로 이 일을 하시게 된 계기가 1970년에 한인 학생들이 한국의 역사를 너무 몰라 그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공부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교육국을 통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국 역사를 필수 교과과정에 넣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미주의 한인
동포들이 카너 회장이 해오던 일을 이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코 이야기’를 통해 전해진 ‘한국’과 ‘한국의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한국판 ‘안네의 일기’인 ‘제시의 일기’를 통해 풀어갔으면 한다. ‘제시의 일기’를 부모들이 자녀들과 함께 읽으며 우리 조상들이 걸어온 길을 배웠으면 한다. 이제는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의 멋지고 자랑스러운 한국을 이 나라에 알렸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미국 교사들이 한국에 대해 배우면 한인학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타인종 학생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 www.PAAHE.org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