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병우 박사를 생각한다

2009-03-0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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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받은 지인의 메일로 한글타자기로 더 알려진 공병우 박사의 생전의 자상한 프로파일을 접하게 되었다. 1995년 3월 7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 최초의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는 유언에서 “장례식을 치르지 마라,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모두 병원에 기증하라, 죽어서 한 평 땅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것이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에 써라”는 말씀을 남기고 이승을 떠나셨다고 한다.

6.25 전 남산초등학교 시절 눈병이 났을 때 어머님을 따라 광화문에 있었던 공안과에 몇 번 다닌 적이 있었다. 그 근처는 기와집들이 행길보다 낮은 오래된 길에서 유독 공안과만이 현대적 빌딩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한번만 더 오면 된다며 머리를 쓰다듬던 그 의사선생님이 고성능 한글타자기를 발명했고 한글 텔레타이프, 한영 겸용 타자기, 세벌식 타자기 등을 발명한 바로 그 공병우 박사인줄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되었다.

1938년 한글학자 이극로씨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감화를 받은 뒤, 그 분은 한글의 과학화에 앞장섰다. 한국일보에 의해 ‘한국의 고집쟁이’ 6위로 선정된 그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일제시대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공병우 사망’을 선언했고 서슬 퍼런 5공화국 때도 정면으로 정부를 비판했으며 자신의 옷과 신발은 헤어지고 밑창이 다할 때까지 신으며 검소하게 살았지만 맹인 부흥원을 설립하는 한편 장님을 위한 타자기, 지팡이도 개발했으며 그들을 위해서는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지난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따른 검소한 사랑의 삶이 오버랩 되어 참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게는 그 분이 LA에 오셨을 때 TV 인터뷰에서 “구원은 어떤 한 종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며 또 천국을 오늘의 현세에서도 살라는 말씀은 그분의 미소와 함께 내 마음에 각인 되어 있다.

3.1절 90주년은 맞아 잊혀졌던 독립유공자들의 삶이 재조명되면서 우리에게 감명을 준다. “나의 길은 오직 하나라는 독립정신을 고수하며 사시는 100세가 넘으신 최고령 독립유공자 구익균 옹, 최근 호적을 되찾았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 그리고 이하전 옹 등의 삶은 소유와 승자, 일등만 대접받는 오염된 사회에 청정한 약수처럼 새로운 기운을 충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집안에도 독립유공자이신 김진성 큰아버님과 김승문 오빠(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낳기 훨씬 전에 그 분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일본으로 떠나시고 한국에 남은 가족들은 예측할 수 없는 세월을 기다림 속에서 고심하면서 살았다. 해방이 되어 이 분들이 돌아왔어도 가정적으로 복잡한 어려움은 계속 많았었다.

그분들의 뜨겁고 일관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희생적 의지의 삶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의 독립된 자주 국으로 발전되어 세계경제 11위의 나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인생의 방향은 헤아릴 수없이 많다. 얼마나 노력하며 사회에 공헌하느냐가 인생의 지표라고 하신 공병우박사님, 남의 눈치보다는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며 소아보다는 큰 뜻에 따르며 사랑을 실행하신 공안과 의사이신 공병우 박사님, 그의 넓고 실용적인 그늘에서 우리는 한글타자기로 헤아릴 수없이 많은 국가나 개인의 일을 처리해왔으며 이제 컴퓨터로 상상을 초월한 만능의 일이 가능해졌다. 영원한 젊은이로 세상을 사신 공병우박사님의 기일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표하고자 한다.

우리가 바라는 좋은 삶, 훌륭한 삶이라는 것은 만족, 열반, 행복과 같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의 과정을 의미하며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말한 칼 로저스의 주장은 음미할 만하다.

김인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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