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암리의 3.1절

2009-02-2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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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한국으로부터 두툼한 2009년 달력이 배달되어 왔다. ‘마라나다’사에서 편집 제작한 달력의 열두 달 화보가 인상적이다. 1월은 1885년 최초로 세워진 정동 제일교회를 시작으로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교계가 인천 항동에 세운 선교 100주년 기념탑, 그리고 탄생 100주년을 맞는 심훈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이 활동한 기념관이 있는 안산 샘골교회, 그리고 광복의 달 8월에는 3.1운동 조형물이 인상적으로 서있는 제암교회가 나온다. 그 제암교회에서 나에게 달력을 보내주었다.

돌아보면 제암교회 담임자 강신범 목사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이란 다름 아니라 인천에서 목회하던 때 교인인 그분이 직장 사고로 입원 수술을 받은 후 인생의 목표를 바꾸어 늦었지만 신학을 공부하겠다기에 추천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한 인연이다. 그래서 작년 한국에 갔을 때 제암교회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가서 보니 제암교회는 소문으로 듣던 그대로 그날도 방문객이 줄지어 서있는 국가지정 제299호 사적지였다. 제암리는 수원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조용한 농촌이다. 그 순박한 농촌에 3.1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고 여성들은 태극기를 만들어 1919년 4월5일 발안 장날을 맞이하여 대규모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당황한 일본 경찰의 진압과 가혹한 매질로 교인이던 김순하는 창자가 옆구리로 튀어나왔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들것에 떠메어져 돌아왔다. 그러나 탄압을 받자 더욱 투철한 신앙과 민족사상으로 단결된 이들은 굴하지 않고 밤마다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면 인근 주민들이 일제히 만세를 불러댔다.

그러자 경찰과 헌병대의 잔악한 학살이 계획되었으니 ‘지난 4월5일 발안 장터에서 만세 부를 때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 같아 사과하고자 하니 15세 이상 남자 신자들은 예배당에 모이라’는 거짓 통지를 보내왔다. 선열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비겁하지도 말자고 하며 예배당에 모이니 기다렸다는 듯이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집중사격과 방화로 예배당은 전소되고 그 안에 있던 남자 21명과 뜰에 있던 부인 2명이 총살되고 불에 타죽었다. 그뿐 아니라 보복으로 외딴집 한 채만 멀리 떨어져 있어 남겨두고 제암리 전체 32호 초가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 26년 후인 1945년 드디어 광복의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그런데도 한스럽고 분한 제암리 순교사건은 그냥 묻혀만 있었다. 그러던 중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푼 꿈을 안고 첫 목회지로 1980년 제암교회에 부임한 강 목사는 그토록 자랑스러운 교회의 순교 역사를 보고 이를 알리고 보존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백방으로 호소하여 결국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의 승인과 협조를 받아냈다.

총에 맞고 칼에 찔리고 불에 타 재에 묻혀 산재해있던 23구 유해를 모두 발굴하여 입관하고 1982년 9월28일 합동장례를 치른 후 23인 순교묘지를 만들어 안장하고 23인 상징 조각을 세우고 불타버린 초기 교회와 순국 역사를 복원하여 시청각 교육실 1, 2전시관을 통해 이를 알리고 있다.

금년은 바로 3.1 독립운동 90주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이다. 숭고한 순교의 현장 제암리 교회는 말하고 있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제암마을 3.1 정신이 우리에게 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박석규
은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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