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렵기 때문에

2009-02-1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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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미국

11세 때 공상과학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소설 속의 우주선 선장은 여성이면서 언어학자였다. 그녀의 성은 ‘왕’으로 ‘캡틴 왕’으로 불렸다. 그래서 독자들은 당연히 그녀를 동양인, 그 중에서도 중국인이라 여겼다. 그녀는 언어를 아주 쉽게 배우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독백을 할 때는 ‘바스크’ 말로 했는데, 소설의 인물 중 하나는 그 말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라 했다.

디트로이트에서의 11세짜리 일상이어서 영어가 아닌 말을 들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 나는 바스크어가 어디에서 쓰이는지 알 턱이 없었다. 캐나다와 가까워 캐나다 프랑스어 TV 방송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게 외국어의 전부였다. 곧 바스크인들이 스페인 북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내 관심의 실체는 그 말이 가장 배우기 어려운 말이란 사실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우리가 달나라에 가려는 것은 그것이 쉽기 때문에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한 10년 전 연설의 재방송을 당시 들었던 것도 생각난다. ‘어렵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해 내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어 보인다. 쉬운 일을 하며 시간을 소비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세대는 학생 때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다. 6학년 때엔 12학년의 수학 책이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다. 수많은 기호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진실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을 캐내는 것이 무척 어려워 보였다.

지금쯤 독자들은 “나이 든 선생이 고리타분한 회상을 하고 있구만”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곧 “요즘 학생들이 어려운 것은 뒤로 하고 쉬운 것만 골라하고 있다”라는 한탄을 하겠구나, 짐작할 것이다.

실은 그렇지가 않다. 요즘 학생들도 도전을 좋아하고 어려운 것을 배운 후의 성취감을 즐기는 것을 본다. 특히 컴퓨터 프로그램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느끼는 데, 그 중에서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에게서 많이 느낀다. 프로그래밍은 그동안 공부해 왔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기묘한 공부다. 그런데도 결국엔 모두 감사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그들에겐 어려움이 우리 때와는 다르게 전달된다. 요즘 우리는 ‘유튜브’(YouTube)를 통해 스탠포드나 MIT의 고급 물리, 수학, 컴퓨터 과학 등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우리 학생들도 이 비디오들을 보는데, 그 어려운 학교의 시험을 보거나 점수를 따야 할 걱정이 없으니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강의 내용을 이것 조금, 저것 조금씩 배운다고 한다.

나 역시 그 비디오들을 즐긴다. 고도의 기술을 통해 보는 것이지만 마치 1979년도 강의처럼 보여 더욱 재미있다. 커다란 강의실에서 약간 어색하게 생긴 교수가 백묵으로 칠판에 쓰면서 강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쪽에선 소파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랩탑을 통해 본다.

대학 강의 링크가 많이 있는 그 웹사이트엔 언어강의 링크도 있다. 내용이 유익한 것도 있고 그저 웃기게 만든 것도 있는데, 오늘 오후엔 일을 하는 동안 ‘김치 걸스’라는 젊은 한국여성이 가르치는 중급 한국어를 잠깐 들었다. 한국 TV에서 봤던 한국어 강의와 비슷한 형식이었다. 한국 팝송 가사를 읽고 영어로 번역, 설명하는 식이었다. 노래는 20년 전에 들었던 노래와 다름없이 아주 감상적이지만 형식은 힙합이었다. 귀로 듣기만 했지만 재미있었다. 앞의 강의들처럼 어려운 ‘한국어’가 쉽게 전달되었다.

내가 처음 한국말을 공부했던 80년도엔 잘 쓰인 교과서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학생이 거의 안 배우는 한국어를 공부한다는 사실이 흐뭇했다. 타이프라이터로 친 한글과 손으로 쓴 한자가 섞여 쓰인 교과서로 찬찬히 공부했다. 세련되지 않은 그것이 매력이었다. 아직도 그 책들의 종이냄새가 뿌듯하게 기억난다.


그때 ‘김치 걸스’가 있었다면 내가 도움을 받았을까?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20대의 나를 되돌아 보건데, 사양했을 것 같다. 만약 도움을 받았다면 뭔가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기쁘게 도전했던 것은 미국에서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한국적인 것을 대한다는 매력 때문이었다. 서양에서 파생된 힙합은 내게 그런 트릭을 부릴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모델은 아직도 공상과학 소설 ‘바벨(Babel) 17’의 ‘캡틴 왕’이다. 나의 한국어 실력은 아직도 이르고 싶은 경지에서 한참 멀다. 수학도, 물리학도 그렇다. 하지만 새 것을 배우기에 벅차게 된 40대 후반의 나는, 비록 은유법을 쓰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달나라에 가는 것을 상상하고 있다.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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