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2월의 사색

2008-12-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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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처럼 투명한 햇살이다. 12월 햇살은 병에 시달린 수척한 여인의 낯빛을 닮았다. 마당 가득 찾아든 햇살은 마지막 낙일을 찍고 있다.

가슴 안에서 쓸쓸함이 바람처럼 일어났다 사라진다. 연초에 꿈꾸었던 토란 알 같던 계획들은 역시 꿈이었나, 장미꽃이 지천으로 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어디 가고 흉내 내다 만 서까래 몇 개가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한해를 훌쩍 떠나보낸다는 것은 인연을 맺고 풀면서 살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상식과 격식이 통하는 인연이라면 꽃향기보다 향기롭고 그윽하다. 12월은 그런 마음들을 통하여 결실을 맺는 매듭을 믿음으로 다지는 달이기도 하다.


어느 한 가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실과 혼돈의 시대에 살면서, 서로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는가. 어찌 보면 인생은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 인간 관계에서 어느 때는 한 걸음 물러서고 싶을 때도 있다.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잠시 거리를 두고 나로 인해 상대가 불편하지 않았을까 하다보면 길이 다시 보이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거리를 둔다는 것은, 그 관계를 유지하는 지혜일 것 같다.

12월을 보내는 지금은 겸허한 마음으로 용서를 실천하면 좋겠다. 아직도 마음만 있고 미처 못다한 용서가 있다면 이 해가 저물기 전에 털어 버리고 새해를 맞는 기쁨을 누렸으면 한다. 사상가 볼테르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용서 한다는 것은 용기인 동시에 자신에게 평화를 주는 가장 현명함이라 할 수 있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것은 반딧불 같은 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 되는 것이라 생각해본다.

지난 한 해를 더듬으며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도 허둥대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한인타운 구석구석에서 향수병을 달래려고 소주를 퍼마신 기억만이 새롭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 별처럼 가슴속에 박혀와 밤새 흐느끼던 생각은 지울 수 없다. 고국에서 보내온 그리움의 편지, 한해 내내 가슴을 울렁이며 가을 빗속에 또 한번 저며 온다.

그동안 미국 생활에서 제대로 이루어 낸 일은 없고, 허둥대면서 삶과 공부를 구분하지 못한 채 혼동 속에 살았다. 미지에 대한 걱정을 껴입고 때로는 절망하고 적당히 안주하면서 공부가 안 되면 주변 여건만 탓하며 안달을 떤 것 같다.

12월이 숨 가쁘게 지난다.

지난 정초 가난한 마음속에 밀알하나 심고 눈물겹게 가꾸리라던 사랑이 반기기도 전에 벌써 한해의 마지막에 와있다. 한해 동안 얼마나 사람답게 살며 행복 했나를 묻게 된다.

사람들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바라던 일을 성취해 나간다. 그러한 순간들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굳이 행복을 추구할 것도 없지 않나 싶다. 인생에서 간간히 번득이는 기쁨과 즐거움의 순간들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순간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요 행복을 붙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행복은 우리의 삶속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희망적 삶의 현장에서 떨어져 나가면 물러나고 다가서면 물러나는 것으로 손닿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 하면 우리는 행복의 실체에 거듭 속으면서 또 하루의 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안주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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