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과 미국

2008-12-2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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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움’ 대 ‘행복함’

지난 1세기 간 영어에서 ‘merry(즐겁다)’란 말은 단 한 예를 제외하곤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그 예외가 바로 ‘즐거운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이다.

사실 영어가 모국어인 나라들은 미국을 제외하곤 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Happy Christmas)’ 라고 한다. 미국인들만 생일, 새해, 추수감사절에는 ‘행복한’이라면서 크리스마스 때에만 각별하게 ‘즐거운’이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에선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즐거운’이란 말이 독특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화목이 특별하게 표현되는 날이라서? 그렇지는 않다. 가족 간의 화목은 크리스마스보다 추수감사절과 더욱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관련되어서? 그것도 아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보다 부활절에서 더욱 종교적 의미를 찾는다.


그럼 크리스마스의 어떤 ‘즐거움’이 색다른 걸까?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은 대개 알 것이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때 마다 느껴지는 특이한 종류의 죄책감으로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익숙해왔던 것이다. ‘선물’이다. 물질주의, 소비주의, 낭비주의.
우리는 어릴 적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 전부터 부모님, 목사님은 물론 TV 만화영화 주인공들로 부터 크리스마스엔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 우린 “물질주의가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를 잃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앞에 ‘행복한’이 아닌 ‘즐거운’이란 형용사가 붙여지고 있음은 그리 간단하게 설명될 일이 아니다. ‘행복함’은 느낌이 좀 더 깊고 실체적이며 불후의 가능성도 의미한다. ‘즐거움’은 몇 시간 혹은 며칠 정도의 느낌을 의미하며 대체로 숙취 혹은 크레딧카드의 빚이 따른다. 그다지 좋은 의미로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즐거움’엔 미덕이 따르지 않은 걸까? 글쎄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작년에 결혼한 내 동생의 아내 때문이다. 제수는 작년에 처음으로 미시간의 시댁에서 우리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녀는 우리 선물들의 숫자에 무척 놀랐다.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7명의 식구들을 위해 50-60개의 선물이 즐비했던 것이다. 과잉소비 물질주의자들! 그녀는 사양해가는 자동차 산업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미시간에서 고정된 수입으로 생활하는, 부자도 아닌 시부모가 크리스마스 선물에 막대한 돈을 쓰는 것을 한심해했다. 특히 많은 선물을 고집하는 시어머니가.

그녀는 시부모의 가정경제를 돕고자, 선물이 너무 많고 부담되니 내년부터 한 사람이 선물 하나만 마련하여 주고받으면서 절약하고 과소비 않는 크리스마스를 맞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크리스마스의 참 뜻을 잃지 않을 것이라며.

어머니는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저 재미삼아 싼 것으로만 해도 좋으니 숫자는 많게 하자 하셨다. 새 며느리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 같아 미안했던 어머니는 편지까지 띄워 그 이유를 설명했다. 1930년도 대공황 때 남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머니는, 당신의 어머니께서는 모든 가족이 되도록 많은 선물을 받도록 애쓰셨다고 했다. 아무리 싼 선물이라도 포장을 여는 기쁨을 맛보는 횟수가 많도록 하셨다 했다. 경제가 안 좋더라도 가족 전통이 그러하니 금년엔 그 수를 조금만 줄여보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몇 달러짜리 핫소스와 초컬릿,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사진을 끼운 액자, 1970년도 헌책방에서 사서 열심히 읽고 잊었던 공상과학책의 또 다른 헌 카피 등의 선물을 열고 또 열 것이다. 가족 모두가 선물을 다 열려면 또 몇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우린 모두 ‘즐거울’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이 며칠 동안의 ‘즐거움’은, 설날 혹은 추석에 교통난을 뚫고 귀향하는 한국인들이 고향, 가족과 갖는 심원한 느낌에 비하면 얄팍하고 하찮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때로 우리 삶에 작은 빛을 비춘다.


특히 어려움을 겪을 때 그렇다. 그 ‘즐거움’은 내 어머니에겐 1936년 대공황에 빠진 노스캐롤라이나 작은 마을에서의 빛이었다. 나는 내 아들이 할머니의 그 ‘즐거움’의 빛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전할 것임을 믿는다.

자동차 산업부진으로 타주 보다 더 깊은 불경기에 빠진 미시간의 금년 크리스마스. 이곳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즐거울’ 수는 있을 것이다.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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