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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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멘토

2008-12-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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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을 함께 해온 아내가 암으로 간지 두 달이 되어온다. 자신이 디자인한 방, 자신이 선택해 둔 자리에서 사진 속의 아내는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40여년 전 오하이오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였지만 내 생의 멘토였다. 매사에 긍정적이었고 의지가 강했던 아내는 2006년 겨울 시니어 마라톤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했다. 마지막엔 두 손을 땅에 대고 기어서 골인한 우승이었다. 여행에서 음악, 댄싱, 스포츠, 독서에 이르기까지 무엇에나 적극적이었던 아내는 자신이 누리는 ‘삶의 즐거움’을 될수록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아내의 투병 중에 내가 강의를 부탁받고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는 무슨 소리냐고 거절해선 안 된다고 내 등을 밀었다. 우리가 사는 샌디에고 북쪽 글렌아이비의 인구 300명 남짓한 트릴로지 커뮤니티의 노인들을 위한 무료 강좌였다. ‘노인의 건강과 행복’에 관해 강의를 하며 나는 최선을 다한 헌신적 일생, 그 보람과 기쁨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했던 아내의 자세가 내게 얼마나 큰 힘이었나를 새삼 느꼈다.


그가 가버린 지금 때로 외롭고 쓸쓸해지면 행복을 스스로 만들며 살던 아내를 기억한다. 더 많이 웃으라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면 더 즐거워진다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아내를 닮아보려고 애쓰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러고 보니 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내 외에도 내겐 평생 잊을 수 없는 두 분이 있다. 남들은 하나도 못 갖기 십상인 멘토가 내겐 3명이나 있었던 셈이다.

한 분은 내가 레슬링 선수로 활약했던 사대부고 시절 코치였던 이상균 선배다. 그분과 함께 호주 멜본 올림픽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던 나는 그 후 계속 국내외 대회에 참가하며 어린 나이에 한껏 바람이 들어 있었다. 자유당 정권하에서 정치깡패들이 판을 치던 세상이었고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이들과 엮이기 쉬운 세태였다. 설치고 다니던 당시의 내 앞날을 걱정해주면서 내게 더 건강하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라며 미국 유학을 강권한 분이 이 선배였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난 지금쯤 학문은커녕 어두운 길에서 헤매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낯선 미국에서 좌절하던 나를 일으켜 세워준 분은 스탠리 커피 박사, 웨스턴 미시간 대학원 임상심리학과 과장으로 내 담당교수였다. 장의사에서 시신처리, 레슬링 코치 등으로 학비를 벌며 도장 지하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나는 커피 교수도 철도 노동과 권투 연습상대로 고학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근감을 느꼈다. 그래서 도저히 학비 마련이 힘들어지자 그에게 휴학을 의논했다. 그는 “최선의 노력을 하면 항상 목적 달성의 길은 열리는 법이지”라며 내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장학금 주선과 함께 그는 자기 집 정원사로 나를 고용했는데 내가 받은 임금은 정원사로는 너무 후한 금액이었다. 고마워하는 내게 “다음에 다른 사람을 도와라. 자신이 받은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러주었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몇 년에 한 번씩은 달려가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지만 지금 커피 교수는 세상에 안 계신다. 그러나 그 분이 남겨준 교훈은 평생 나를 따라 다닐 것이다.

내 삶의 빛이 되어준 멘토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한편으론 급해진다. 나도 누구에게 멘토가 될 수 있을까. 누구나 늘 이 질문을 마음에 담고 산다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두렵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이정기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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