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각하는 삶- 마지막 소원과 행복

2008-12-13 (토)
크게 작게
독자들은 얼마 전 브랜든 포스터라는 11세 백혈병 환자의 ‘마지막 소원’을 기억할 것이다. 그 소년은 배고픈 노숙자 돕기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로 정했고 그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그 일에 동참했다. 11세짜리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면 얼마나 알고,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소박한 진리를 얼마큼이나 깨달았었겠는가? 병으로 인해 풍선처럼 부은, 그러나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의 아이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고, 살아있는 며칠 동안에라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었다.

우리가 만약 시한부 생명이라면, 어떤 결정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볼만하다. 가톨릭에서는 묵상과 체험의 장으로 ‘관’ 속에 들어가 누워 있다가 나오는 성서연수가 있다. ‘관’ 속에 있는다면, 지나간 세월이 눈앞으로 흘러갈 것이고, 필자도 해 본 경험은 없지만, 종래의 질문은 ‘나는 잘 살았는가’일 것이다. 후회 없이 사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성공한 삶’이 ‘내가 누구였다’는 아닌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어느 누구든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하겠는가?’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내 삶이 몇 사람만이라도 타인을 돕는 생활이고 싶다는 대답을 듣고 싶다. 그러면 모든 이들이 ‘평범하게 행복한 이’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항상 세상의 중심이고, 우리의 생각은 ‘나’라는 범주를 벗어나기 무척 힘들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내가 느끼는 행복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길은 여러 가지이다. 물질추구이던, 명예추구이던, 향락추구이던, 권력추구이던, 위의 것을 다 추구하던 그 형태와 방법은 개인의 우선순위에 달렸다. 그런데 결국 가장 이기적인 것은 가장 이타적인 것과 상통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남을 돕는다는 것이 단순히 남을 도와주는 데서 끝나고, 그것이 그냥 결과고 목적으로 남지는 않는다. 그 속에 ‘보람’도 있고, ‘안도’도 있고, ‘만족’도 있고, ‘행복’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을 돕는다는 것이 정말 ‘타인’만을 위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 행동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그 일이 하고 싶고, 행복해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런 이들은 무엇을 가지고, 지니고, 모아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니고 있는 물건과 기술과 마음을 행동으로 바꾸어 내주어야 행복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남을 돕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최근 영화배우 성룡은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처자식에게 한 푼도 남기지 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도 말이다. 내 자식, 내 처, 내 일가에게 잘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인데, 그 본능적인 것 말고 한 치 건너 내보이는 마음이 있어야 ‘세상을 잘 살고 있다’고 하겠다.

올 연말에는 구세군 냄비를 지나치지 말고, 단돈 5달러라도 넣어보자. 그러고 나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어 있는지 느껴보자.

로라 전
<한국문화 유산재단 회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