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화해선 안 될 것들

2008-12-1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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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해야 했던 일들 중의 하나는 타 대학의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고급인력을 찾기 때문이었다. 많은 지원자들 중 마지막 3명의 후보를 선정했는데, 그들은 우리가 아무 때나 그들의 현 직장에 전화를 걸어 동료 중 어느 누구하고 라도 그들에 대해 물어봐도 좋다고 했다. 지원자가 지정한 사람들하고만 대화를 나눴던 이제까지의 방법과는 좀 달랐다.

우선 그들이 속한 대학 학과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그들을 알만한 교수들의 명단을 봤다. 그들 중엔 한인도 있었다. 그러면 반드시 클릭해서 그들의 정보를 훑어보게 되었다. 한인도 아니면서 한인이라면 무조건 관심을 갖는 나 자신이 약간 우스웠다.

학회에서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많은 전산학자들이 그렇듯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 금방 어울리는 편이 못 된다. 하지만 한인들과는 그렇지 않다. 왠지 그들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한다. 가벼운 대화 나누는 일에 익숙지 못해서 ‘한국’을 소재로 얘기를 시작하는 게 편해서 일까? 아니면 한국에 잠깐 살았기 때문에? 한인 아내와 20년을 살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까?


그럼, 그렇게 모르는 한인들과는 한국의 무엇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걸까? 그리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걸까?

어떤 소재는 한국말로 하는 게 더 재미있다. 예를 들어 여행, 음식, 가족 등이 그렇다. 생활철학 같이 좀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그렇다. 하지만 어떤 소재는 결코 한국말로 해선 안된다는 것을 배우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정치에 대한 얘기가 그렇다. 정치용어를 잘 몰라서 라기보다는 상대가 은연중에 보이는 정치성향을 읽기가 힘들어서이다.

힐러리에 대해 말할 때, 말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꼬는 것인지 알아채기가 힘들다. 일본에 대해서도, 유머러스하게 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경우엔 오해를 해서 기분 상하기 십상이다.

정치 이야기는 간단한 주제(디트로이트 자동차회사를 구제해야 하는가?)로 시작했다가 복잡한 주제(인공유산)로 끝나기가 쉽다. 그러면 난 한국어로 하다가도 영어로 바꾸고 만다.

미국에서 만난 대개의 한인들 영어는 나의 한국어를 훨씬 능가한다. 그렇긴 해도 한국말이 영어로 바뀌어 지면 아무래도 영어로 말하면서 더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상황은 더 예민해지게 될 수도 있다.

취미도 고약하게 내가 한인들과 가장 즐겨 얘기하는 것은 일상적 모임에서 한인들을 만나면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배운 것들이다. ‘기독교’가 그 한 예다. 물론 불교에 대한 얘기도 해봤지만, 기독교에 대해 얘기할 때와는 많이 다르다.

어머님이 평생 교회 오르간 연주자셨고 거의 목사임명을 받을 정도로 기독교와 가까우셨기 때문에 난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기독교는 아직까지 내 생각을 지배한다. 우리 가족은 성경과 종교적 믿음, 옳고 그른 것, 예수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을 많이 했다. 어머님은 항상 우리 형제에게 ‘하나님이 주신 머리’를 이용하라고 하셨다. 성경을 읽을 때도 성경학교 선생님의 가르침을 무조건 따르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탐구하라 하셨다. 살다 보니 그런 태도는 믿음을 오히려 깊게 할 뿐만 아니라 남의 종교도 무너뜨리는 힘을 지녔다는 것도 배웠다.

내가 아는 한인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다. 역사를 통해 결코 불교를 배제할 수 없었던 나라인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다. 여러 교파의 한인 교인들이 같은 교파의 미국인 교인들에 비해 보수적인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성경에 쓰인 그대로를 다 사실로 믿는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 안에 계신가?”라는 질문을 믿음의 중요한 잣대로 쓴다. (어떤 스님이 그 말을 이렇게 바꿔 쓰는 것을 봤다: “부처님은 당신의 마음속에 계신가?”) 그래서 끈질기게 토론하고 싶어 하는 나와의 대화를 쉽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언젠가 경주 근처의 한 집에서 아침을 맞은 적이 있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근처 절에서 나는 종소리인 줄 알았는데 교회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찬송가 “죄짐 맡은 구주”를 경주에서 종소리로 듣다니.

여러 면으로 한인들을 친숙하게 느끼지만, 종교에 관해 얘기할 때면 가깝기는커녕 오히려 멀게 느껴진다. 더 나이 먹고 더 현명해지면 그 거리를 좁힐 수 있으려나.

케빈 커비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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