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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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색은 불가능

2008-11-0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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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이른 아침, 밤늦게까지 선거결과를 보고 전국적 축제 무드도 즐긴 후 일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선거가 그렇게 일찍 마감되어 다행이다. 선거 결과가 분명치 못해 시간을 질질 끌었던 2000년 선거 때엔 한국에서 TV를 보며 마음 조렸었다.

집집마다 황금색 가을나무들이 즐비한 앞마당에 정치 사인들이 줄줄이 서 있다. 사인들은 지난 몇 주 사이 부쩍 늘어나 어떤 선거 때보다도 훨씬 많았다. 그렇게 많은 사인은 평생 처음 보았다. 반 수 이상의 집들이 사인을 세웠던 것이다. “오바마” “메케인” “오바마” “메케인”… 거의 반반이다.

십년 이상 알아 온 이웃들이다. 어떤 집을 보면서는 “당연히 오바마를 지지하지”, 또 다른 집을 보면서는 “그렇지, 메케인 편이지” 한다. 함께 정치 얘기를 해 본 적이 없던 새 이웃의 사인을 보면서는 “아, 저 사람들은 그 편이군. 그랬구나” 한다.


그렇게 많은 파란색, 빨간색 사인을 보면 이곳에선 정치토론도 대단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후보들에 대한 얘기를 상당히 많이 나누는 편이긴 해도 대개 같은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만나 얘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지하는 후보에 대해선 긍정적 얘기를 나누고, 지지하지 않는 후보에 대해선 불평과 조크를 한다. 결코 토론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오하이오가 ‘전쟁터’ 주라 불리지만, 일상을 보면 전쟁은커녕 토론조차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금년엔 주위에서 누구를 대통령으로 찍을 지 마음 정하지 못한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도 했다.

파란색 주 오하이오 거리를 지나 20분 떨어진 빨간색 주 켄터키로 향하면서 생각해 봤다. 무엇이 우리를 파란색 혹은 빨간색으로 만드는 걸까?
나는 파란색 중에서도 파란색인 디트로이트에서 자랐다. 우리 집 쪽에 있던 고속도로는 자동차 산업 노동조합 운동 영웅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워터 루터 고속도로’라 불렸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신시내티에선 그와 정반대 인물의 이름을 딴 고속도로 쪽에 산다. 노동조합 세력 쇠퇴를 가속화했고 무엇보다도 파업에 들어간 항공 관제사들을 파면시킨 일로 유명한 전 대통령 이름을 딴 ‘로널드 레이건 고속도로’이다.

1980년 전국 공화당 전당대회 때 로널드 레이건이 디트로이트에 왔었다.

당시 내 동생은 고등학생 대표로 선출되어 그 대회에 갔었다. 대회가 끝난 후 그는 레이건이 섰던 단상에 올라가 볼 수 있었다. 그 감명 깊은 경험은 그를 보수주의자 중에서도 정통 보수주의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5년 후 그는 진보주의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국 진보주의자로 전향했다. 그리고 지금은 역사학 교수로 진보적 학생들을 키운다.

동생을 줏대 없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내 의도는 전혀 그게 아니다. 우리가 어떤 한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 중에는 우리의 지적 사상을 둘러 싼 간과할 수 없는 신적 이유도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 스스로에서도 그런 경향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 경우는 좀 더 복잡하다. 어머니는 1932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흑백 분리정책이 굳게 자리 잡은 사회에서 자라셨다. 성장하여 뉴욕의 대학원을 갈 때까지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뉴욕에서 디트로이트로 이사한 후 신학자로서 장로교회를 통해 사회봉사 관련 일을 하면서 평생을 진보주의자 중 진보주의자로 사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이 드시면서 수십년동안 전혀 보이지 않으셨던 남부 근성(?)을 보이신다. 이번 선거에서도 오바마에 대해 심경이 복잡하셨다. 오바마의 정책을 좋아하면서도 마음 깊이 흑인 대통령에 대해 마음이 불편하신 것을 옆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은연중에 흑인을 못 미더워 하시는 것이었다. 결국 인종차별인 것이다.

우리가 파란색 아니면 빨간색이 되어야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 두 가지 색으로 그려진 미국의 선거 지도는 미국의 잘못된 점을 드러낸다. 한 국민이 그렇게까지 분리되어져서는 안된다. 그럼 파랑과 빨강이 합친 자주색이 되어야 할까. 물론 그건 결코 현실적일 수 없다. 내 스스로도 결코 자주색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

집을 나설 때 앞집의 샘이 “오바마” 사인을 뽑아내고 있었다. 우린 큰 미소와 함께 서로에게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어 올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내 차가 골목을 빠져 나갈 때까지 손가락을 높이 들고 서 있었다.

케빈 커비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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