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네 편의 칼럼

2008-10-2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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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년 전 이 칼럼을 쓰게 되었을 때다. 신문에 내 의견을 싣는 것 특히 아직 유창하지 못한 언어의 문화에 대해 쓴다고 나선 내가 뻔뻔스럽기도 했고 제법 담력 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심 걱정이 되었다.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전산과 교수가 ‘한국/미국’이란 칼럼을 어찌 쓸 수 있을까?
엊그제 컴퓨터에 입력 시켜 놓은 지난 칼럼들을 읽어보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약 40편의 칼럼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오직 4편 정도를 쓴 것과 다름이 없었다. 표현만 달랐을 뿐이지 40편의 칼럼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오직 4가지뿐이었다.

칼럼 타입 1: 혼합체는 훌륭한 것이다.

우리 아들은 혼혈아고 나는 그것이 무척 부럽다. 미국은 바로 그런 혼합체이다. 미국은 폭력적이고 비교육적이고 독소적이며 탐욕스럽다. 하지만 미국은 평화적이고 이지적이며 자연을 사랑하고 인심이 후하기도 하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선생님은 언어학 교수로 멕시코에서 원어를 연구했었다. 그 언어는 멕시코 문명을 대표하는 아즈텍에서 비롯된 언어다. 하지만 원어민들은 종종 스페인어를 함께 사용했다.
그래서 어떤 언어학자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떠나고 스페인어와 ‘순수’ 아즈텍이 섞여지는 것이 멈춰주길 빌었다. 하지만 그 교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언어들이 어떻게 섞여지고 어떻게 비 순수하게 되어 지는가를 보는 것을 즐겼다.


칼럼 타입2: 멀리 동떨어져 길 잃은 듯한 느낌의 애틋함.

어려서 노스캐롤라이나로 가는 차를 탔을 때, 십대에 과테말라로 가던 때, 그리고 신혼여행 차 생전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도착했을 때, 난 금성이라도 간 듯이 느꼈다. 그곳들은 내가 살던 곳과 너무나 달랐다. 그렇긴 해도 난 어느 때보다 내가 살아있음을 강렬히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몽골을 가도, 아메리카 대륙 남단을 가도 동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영어와 인터넷 덕분에 세계 어디를 가도 똑 같다는 느낌이다.
문화적 차이가 많이 없어졌다. 그것이 슬프다. 외국여행을 옆 동네 가듯 하는 아들은 멀리 동 떨어져 있는 애틋함을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칼럼 타입 3: ‘우리’는 나쁜 말이다.

‘우리’란 말은 단결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와 상반되는 면을 갖고 있다. ‘우리’ 는 꼭 ‘그들’을 동반한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우리 그룹’ 을 구성하고 나서 ‘너희 그룹’과 맞선다. 나는 아직도 한국계 미국인 2세가 미국 운동팀의 한국 선수를 특별히 응원하는 것을 보면 뭔가 어색하다.
어떤 인도 여성이 내게 “당신은 아이슈타인과 같은 인종이라 참 자랑스럽겠다”고 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녀 보다 더 아인슈타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는가?

칼럼 타입 4: 한국 즐기기.

한국을 알고 한국인을 아는 기쁨은 아주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 한국어 문법 중 간접 표현을 하면서 상황에 따라 예민하게 동사 등을 변화시키는 면.
힘겹게 가파른 산 위에 올랐을 때 맡는 향내음. 한국시집과 영어시집 수천 권이 나열된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국 최고산 ‘판야로’ 차를 직접 끓여 내주는 교수. 높은 지하철 계단을 올라 뺨으로 겨울밤 찬 공기를 맞으며 서울을 화려하게 살아 움직이게 하는 네온사인들과 맞닥뜨리는 것.
그리고는 그 거대한 인파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어두운 겨울밤엔 어느 외국인이라도 코트, 모자, 스카프를 쓰고 그 인파 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즐길 만한 일이다.

케빈커비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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