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가 즐기는 한국말 ‘탑 10’

2008-07-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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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몇 년 이상 한곳에 산 사람들은 그 지역의 단골 식당, 좋아하는 경치, 평범하지 않아서 더욱 즐기게 되는 문화적 기행 등이 있다. 언어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한 나라의 말을 몇 년 동안 배우고, 말하고, 읽다 보면 그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지는 못해도 어느새 그 언어의 어떤 부분을 특히 즐기게 되면서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된다.

나는 27살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외국어를 달통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지만(10대에 배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독어, 스페인어, 그리스어를 공부했고 언어학을 부전공했기 때문에 한국어 공부는 대단히 재미있었다.

외국어는 로맨틱한 꿈속에서 공부해야 빨리 배울 수 있다. 최근 한 외국어 공부 소프트웨어 광고는 미국 시골소년이 이탈리아에서 온 수퍼 모델과 함께 다니는 장면을 꿈꾸며 그 언어를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완벽한 광고가 아닌가? 나도 로맨스 속에 한국어를 제법 익혔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배우게 된 한국어 가운데 내가 이제껏 즐기는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다. 한글이나 존댓말 등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진가를 인정하며 즐기는 것들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겠다. 내가 즐기는 좀 색다른 ‘탑 10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10. 비슷한 발음의 의태어와 의성어: ‘뚱뚱’ ‘통통’ 혹은 ‘살살’‘설설’ ‘술술’ 처럼 단 하나의 모음 혹은 자음만 바꾸어 의미를 뚜렷하게 대조시키는 이 언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9. 같은 단어지만 순 한국어, 한문 한국어, 영어 각각으로 표현될 때 생기는 아주 다른 느낌들: ‘춤’ ‘무용’ ‘댄스’가 그 예다. 특히 한문 한국어는 한자로 ‘舞踊’이라 쓰면서 또 다른 느낌을 준다.

8. ‘-뭐’라는 말: 글로 쓴다면 ‘…’라 적듯, ‘something-something-하지 뭐 (한국말로 한다면 ‘뭐뭐뭐 하지 뭐’가 되겠다)’ 라면서 문장을 다 마치지 않고도 말을 끝낼 수 있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7. 널리 쓰이는 간접 인용: ‘-한대’ ‘-이래’ ‘-이라 더라고요’ 등으로 말을 마치면 은연중에 말하는 사람이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은가. 동요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의 가사 중 ‘ -이래’가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코가 손이네’와 비교할 때 끝자 하나의 차이로 직접 본 것과 간접 본 것의 큰 차이를 표현하는 것 이다.

6. ‘불 꺼’와 ‘불 켜’: 불을 끄라고 했는데 얼떨결에 불을 켜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한국인들에겐 이 두 말이 아주 확실히 다르게 들리지만, 나는 아직도 얼마나 헷갈리는지 모르겠다.

5. 입 속에 숨는 발음: 처음 불어를 배울 때 재미있었던 것은 많은 알파벳을 소리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Parlent’는 ‘ 팔ㅎ’과 발음이 비슷하다. 마치 ‘ent’의 발음이 입 근육 신경 속을 파고 들어가 결코 나오지 않는다고나 할까? 한국말의 ‘빗’ ‘여덟’ 등도 그 경우와 똑 같이 재미있다. 마지막 소리가 입 속에 숨고 마는 것이다.

4. 사투리: 전라도, 경상도 등의 사투리 “징글징글 허게도 더웠지라잉” “우야꼬, 내가 잘몬했데이’ 등은 그 뜻을 다 못 알아듣는 외국인에게도 재미있기 그지없다.


3. 이상한 영문 약어:‘그CF를 만든 PD는 그 제품의 AS에 대해서도 아는가?’ 어떤 영어권 사람들이 그 약자들이 ‘commercial film’ ‘producer’ ‘after service’ 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2. ‘피부’라는 단어: 왠지 이 단어의 느낌은 아름답고 연약하며 성적이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다. 이 단어가 부드러운 여성의 피부 외의 것을 의미한다는 걸 상상하기가 어렵다.

1. “응”: 아내와의 연애가 막 시작될 때쯤이었다. 아내는 영어로 대화를 하다가도 전화를 끊을 때면 꼭 고음으로 “응” 하고 끊었다. 영어권 사람들에겐 “uh…” 소리로 들려서 무슨 말인가를 막 시작하려는 구나 싶어 기다리고 있으면 전화를 뚝 끊고 마는 것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 가까운 사람들과 전화를 끊을 때 친근함이 “응”이라는 소리로 절로 표시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아내가 친정식구들과 전화하면서 “응” 하고 끊으면 갑자기 뚝 끊는 것만 같아 불안하다.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럼 나도 여기서 이만 “응”.

한국과 미국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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