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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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

2008-07-0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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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사람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이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아멘”
호레이스 H. 언더우드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5일, 부활절날 아침이었다. 언더우드(한국명 : 원 두 우)는 장로교 선교사로 감리고 선교사인 아펜셀러와 같이 미지의 조선 땅을 밟았으니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는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였다. 이조 말기의 고종 때였다.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면서 조선의 내부로 들어가 보려고 온갖 노력을 했으나 조선의 마음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으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그들에게는 보이지가 않았었을 것이다.
그랬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우리들도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눈여겨 보려했던 미국의 마음은 보이지 않았다. 어린 자식들 앞에서 의연한 척 했으나 속으로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당황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풍족하고 흥건한 땅, 맨해탄을 거닐며 하늘을 보면 장인들 손에 만들어진 높은 빌딩이 옆에 서있는 빌딩을 힐긋힐긋 곁눈질하면서 키 자랑을 하듯이 솟아 하늘을 가리고 있었지만 이곳 역시 나무 한 그루 마음 놓고 자라는 땅은 아니었다. 앞날은 보이지 않았다.
어려운 유학 수속은 어떻게 끝을 냈고, 번민 가운데 이민수속은 또 어떻게 끝을 내고 꿈에 그리던 이 땅을 어떻게 왔는지 그 사실 하나만 기적으로 느껴졌을 뿐이었다.
언더우드 일행은 조선이 부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교지의 방향을 조선으로 잡고 발길을 조선으로 돌린 것처럼 미국이 우리를 부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좀 더 잘 살아보려고 좁은 이민의 구멍을 뚫고 꿈을 가지고 스스로 택해서 온 땅이었다.
미국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이민생활, 아무에게도 어려움을 토로해낼 곳이 없었다. 피차 마찬가지였던 환경에서 아펜셀러는 배재학당과 이화여자대학을 세워 자라나는 학생들이 복음을 안고 사는 청년이 되어주기를 원하였고, 여성들로 하여금 선교의 병사가 되기를 바랬다.
또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광혜원에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연희전문학교는 연세대학교가 되어 명실 공히 한국의 명문대학교로 발전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이민사회에서는 교육열 높은 한인들의 치맛바람을 이용하여 먹고 살기 위한 학원 장사가 초라한 간판을 목적 없이 허공에 휘날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왜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와 같은 기도가 없을까. 신념과 믿음과 미래를 굳게 믿고 보이지 않는 미국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이 되도록 달래며 나아가는 의지가 왜 우리에게는 없을까. 어느 분야이든 언더우드 선교사가 거두어드린 열매처럼 눈물로 기뻐할 열매를 왜 생각하지 않을까.

김윤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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