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인광장- 정직한 도전

2008-06-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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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필

우리 동네엔 소문난 식당이 있다. 늘 미소 짓고 키가 자그마한 주인아저씨는 미국대륙에서의 꿈을 품고 9살짜리 딸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1975년 6월5일 동생이 있는 괌으로 이민 왔다. 고국에서 직업군인으로 공병학교를 다니며 기술을 익혔던 것과 달리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었다. 정직한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깔끔한 튀김요리 기술을 습득했다. 신선하고 좋은 기름으로 배합이 잘 된 밀가루 옷을 입혀서인지 그의 튀김요리들은 유달리 색깔이 투명하고 곱다. 요리사로 오직 맛있는 일본 음식만을 탐구했다. 1993년에야 샌디에이고 우리 동네에 작은 식당을 마련했다. 전체의 상가가 죽은 거나 다름없던 샌드위치 가게자리였지만 이제 북적거리는 일본식당으로 그는 탈바꿈 시켰다.

개업 날 온 종일 가족이 땀을 흘렸지만 매상은 고작 250불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수시학교까지 다녔다는 아들도 걱정이 태산이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이웃에 일본 음식을 꾸준히 알렸다. 손님이 차츰 늘어갔다. 일본음식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아내를 주방에서 가르치며 손님을 받으니 식사가 늦게 나온다는 불평도 들었다. 그런 아내도 이젠 일식요리의 달인이 되었다.


일년 후엔 식당을 조금 확장했지만 겨우 20여 고객이 앉을 정도였다. 초창기엔 6불 정도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으나 임금과 재료비가 올라 이젠 음식 값도 올랐다. 여전히 주말이면 단골들이 찾아와 줄을 선다. 전화로 주문하는 ‘투고’도 인기다. 최근엔 딸 부부에게 운영권을 넘겼지만 독득한 테리야키 소스만은 직접 만드는 H사장님. 3일 동안 푹 고운 고기국물에 여러 가지 양념을 넣고 미원을 사용하지 않는 게 그 분의 비결이란다.

한번은 생선 스시를 시켜 먹은 손님이 머리카락이 있다며 음식 값을 안내겠다고 했다. 정갈하고 푸짐하게 신경을 써서 만든 음식이었는데. 침착하게 손님에게 사과하며 빈 접시를 들여다보니 머리카락은 노랑색이 아닌가. 아아, 이럴 수가! “우리 식당에는 노랑머리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치솟는 분노를 누르며 그는 정중하게 말했다. 동양인 주인을 얕보고 거짓말을 하려던 부부가 음식값을 치르고 휑 나가던 일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단다.

또 배탈이 났다는 남자손님이 식당으로 전화를 걸어 와 치료비를 물어내란다. 식당 문이 닫힌 4시쯤 와서 먹었다니 그 사기꾼의 소행도 들통이 났다. 영어가 부족한 교민들은 미 주류사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부분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가는 게 이곳 실정이다. 열악한 조건인데도 담력이 대단한 우리 해외동포들을 보면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나는 그들의 열정에 백기를 든다.

하루는 이웃가게에서 술을 사서 들고 온 남자손님에게 정중하게 “우리 집에서는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라며 식당에서 나가도록 설득도 했다.

그런 며칠 후엔 두 남자가 찾아와 식당에서 술을 팔면 어떻겠느냐며 주인을 유혹하더란다. 슬그머니 돈 좀 주면 비공식적으로 식당에서 술을 팔수 있는 허가를 만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워낙 정직하고 대쪽같은 그였기에 단호하게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정부에서 나온 암행어사들이었다. 만약 몇 푼 더 버는 돈에 눈이 어두워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감옥행이었노라고. 식당운영 경험이 없는 그에겐 모두가 아찔한 시간들이었다. 법을 어기면 호되게 대가를 지불해야하고 평생 신용불량자로 남는 게 우리가 살고 있는 멋진 미국이니깐. 지난날을 회상하던 그의 눈가엔 그늘이 내린다. 그래서 그 착한 아저씨가 한 때 담배연기로 스트레스들을 푹푹 날리곤 했었구나.

잘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영어회화였지만 그는 순간의 지혜를 매번 발휘했다. 일본 종업원들은 유창한 일본말을 하는 그를 가족처럼 따른다. 14년의 어려운 속에서도 오직 친절과 정직으로 도전하던 사장님.

2006년에 일본 서점에서 그는 ‘갠 간류(혐 한류-한국을 혐오한다는 의미-저자 야마노샤린 山野車輪)’라는 책을 샀다. 분노가 치미는 책 내용 때문이었다. 책을 펼쳐보니 독도(竹島- 일본은 ‘다께시마’라고 부른다)가 일본 영토라며 우기던 2005년에 발행된 책이었다. 표지에는 30만부가 팔렸다는 선전문구도 있다. 일본 말을 모르는 나도 한국을 혐오하는 끔찍한 내용들이 책에 들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알면 알수록 싫어지는 나라가 한국이다’라는 만화책. ‘한국에 더 이상 사과하거나 보상할 필요가 없다’는 등. 당장 그는 한권 더 사서 조국인 대한민국의 모신문사 편집국장에게 보냈다.

한국전쟁 시 20대 청년은 적군을 언제 길에서 만날지 몰라 휴가 때면 수류탄과 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자업자득이었을까. 근무 중 타고 가던 자동차가 낭떠러지로 굴러 운전병과 장교가 죽었지만 운 좋게도 그는 살았다. 최전방 양양의 20사단 창설 멤버로 칭찬도 받으며 양구의 군수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로 19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이민 오는 바람에 다른 손해들도 보았다. 그처럼 목숨 바쳐 뛴 참전 용사도 아니면서 미국 교포들 중에는 행사 때면 가짜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얼굴 두꺼운 사람도 있다.


언젠가 미국 선수처럼 비타민 E를 섭취하여 체력을 길러야한다며 보건체육부 장관에게 우리 선수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편지를 썼던 애국자. 요즈음 한문글자를 전혀 모르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보고 걱정한다. 이웃인 중국과 일본을 이해하려면 한문을 배워야하기에. 우리 부모님들이 당했던 지난날의 뼈아픈 군국주의가 되살아나 우리 국토를 다시 넘어다볼까 나도 걱정이다.

놀라운 세계첨단의 전자제품으로 국가의 위상을 알리고 있는 대한민국. 비록 모국을 떠나 살지만 조국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다. 여기저기 감투를 쓰고 자신의 명예로 생색을 내는 단체장도 많지만 나는 평범한 일상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작은 애국자인 그가 보석처럼 더욱 빛나 보인다. 출세를 위해 거짓 치장으로 남을 속이며 짓밟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이기적인 세상이기에…

평생 고된 일만 시켜온 고마운 아내랑 고국에 나가 50주년 결혼 기념으로 처갓집 친척들을 대접하겠다며 백발의 부지런한 청년 아저씨는 가슴 부풀어 있다. 그리고 기르는 강아지들을 마치 자식처럼 사랑하는 자비로움을 곁에서 보며 또 한번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나는 감동한다.


최미자
‘현대문예’와 ‘수필시대’ 신인상. 재미수필가, 미주문인협회회원. ‘피플 오브 샌디에이고’ 주필 역임. 수필집 ‘레몬향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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