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인광장-아내의 뒷모습

2008-06-0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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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필

저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여느 때의 그 모습이 아니다. 다른 때 같으면 아침식사준비를 하기 위해 부엌에 가있거나 집안 정리를 한다고 이곳 저곳을 서성거리고 있어야 할 시간이다. 아니면 피곤하다며 침대 속에서 부스럭거리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어야 할 시간이 아닌가. 새벽기도에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주저앉는 품이 평상시 같지가 않다.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이 오늘이 처음은 아닌 것 같다.

오늘은 피곤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옆에 내가 있다는 것은 상관도 없다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이 진지하기도 하다. 성경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성경을 쓰는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 전에도 수시로 쓰고 있었는데 완성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이번에도 끝까지 갈 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임하고 있는 자세가 전과는 다르게 진지한 걸 보니 무언가 결과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아내와 함께 타운의 한 옷 가게에 들렸을 때의 일이다. 특별히 무슨 옷을 사기 위해서 들린 것은 아니었고 지나다가 가게가 보이자 아내가 앞장서서 들어가기에 덩달아 따라 들어갔었다. 오래 전 패션디자인 일을 했던 아내는 그런 일에서 손을 뗀 것이 꽤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그쪽 분야에 대한 관심까지도 접어둔 것은 아니었나 보다. 나는 그냥 아내의 뒤를 따라 들어가 건성으로 서성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 가게를 나오려 할 때 계산대 옆에는 성경과 노트 한 권이 펼쳐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가 그 노트에 성경을 옮겨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가게의 종업원으로 보이는 50대 여인의 것이었다.

직장의 영업시간에 성경과 노트가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손님이 없거나 바쁘지 않을 때 틈틈이 써온 것 같았다. 이것을 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써 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내 머릿속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성경 전체를 읽겠다는 마음을 정하는 일도 쉽지 않았던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선뜻 쓰기를 시작한 그분의 각오와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기도 힘든 그 많은 분량의 성경을 손으로 직접 쓰고 있다니. 그것도 바쁘게 일을 하면서 틈틈이…

그런데 그런 일을 내 아내가 다시 시작을 했다는 사실이다. 아내가 왜 이런 쉽지 않은 일을 또다시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나 동기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그때의 그 옷 가게에서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자기 자신도 한번 재도전을 해 보자는 것이었을까. 그러나 아내에게 있어 그 동기나 이유 같은 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아내도 그렇게 한가하거나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은 아니다. 교회에서는 권사님들의 모임에 참여하며 각종 기도모임과 교회 내외에서의 여러 가지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노인 아파트의 반상회를 통한 봉사활동도 작은 일이 아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시간까지는 손자손녀들도 돌봐줘야 한다. 자녀들의 사업관계로 이른 아침부터 저녁에 퇴근하여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돌봐줘야 한다. 우리 부부가 교대로 학교는 물론 과외활동을 하는 곳에도 데리고 다녀야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 많은 분량의 성경을 쓰겠다니 그 결심이나 용기가 대단하다. 존경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시작을 한 동기와 목적 같은 것에 대하여는 내가 궁금해 할 일이 아니다. 단지 작심 삼 일로 끝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의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이 일이 삶을 다 할 때까지도 진행형으로 반복되며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내는 이루지도 못할 일이거나 중도에 포기를 할 일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거나 시작을 하지도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시작을 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나고 있다. 그러나 아내에게서는 아직 멈출 기미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연전에 몇 번씩 시도를 하다가 멈출 때와는 임하고 있는 자세부터가 다르다. 이 끝장이라는 말은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 한번만 쓰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쓰고 또 쓰고를 반복하여 나갈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지막 페이지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언제이며 몇 번이나 반복될 것인가에 대하여도 신경을 쓸 일이 아니다. 아내에게는 이 일 이 생활의 한 부분이 될 것이고 몇 달,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 사람은 끝을 내고 말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 머리를 조아린 채 계속 양손을 움직이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다른 사람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계획에 의한 일이지만 자못 진지하다. 그 모습을 바라다보고 있는 내 마음은 저절로 경건해지는 것 같고 뿌듯함과 행복감에 젖어 들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떤 것에서 얻는 즐거움보다도 더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럴 때 나는 아내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는다. 그녀의 주변에서 서성거리지도 않는다. 방해가 될까 싶어 나오는 기침도 참아가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다보고 있는 나는 행복하기만 하다. 배가 슬슬 고파지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지금 꼼짝을 할 수가 없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한자씩, 한 구절씩 써나가고 있는 저 사람의 집중력이 흩어지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숨소리마저 내지 않고 뒤에서 바라다만 보고 있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다가 아내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면 나는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가스레인지에 물주전자를 올려놓아야겠다. 따끈한 녹차 한잔이라도 대령하기 위해서… 그러고 나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러 밖에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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