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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땅에서 전통문화 유산을 후대에 전수하는 민족들의 노력(2)

2008-03-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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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부모와 자녀들에게 권하는 북미의 역사와 문화탐방

이국땅에서 전통문화 유산을 후대에 전수하는 민족들의 노력(2)

아카디안 박물관의 내부. 필자(사진 왼쪽)뒤쪽 벽에 걸려있는 것이 체티캠프의 특산물인 양탄자 벽걸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체티캠프의 아카디안 마을을 방문하고.
체티캠프에 근거지를 잡은 아카디안들(II)

체티캠프의 주민은 대부분 아카디안의 후손들이다. 아카디안들은 전세계에 총 38만명이 살고 있는데 그 중 캐나다에만 37만명이 있다. 그 중에서도 뉴브런즈윅주에 32만 6,000명이 살고 있으며 노바스코시아주에는 1만1,000명이 살고 있다. 1755년 아카디안 추방령이 내려진 후 영구 거주지가 없이 떠돌아다니던 아카디안들 중 두 가정이 1782년 체티캠프에 영구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고 1785년에 비로소 체티캠프라는 마을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1790년 체티캠프의 주지사였던 스코틀랜드계의 윌리엄 맥코믹이 아카디안들을 위해 7,000에이커의 땅을 희사하여 그동안 떠돌아다니던 아카디안들이 이곳 체티캠프에 집중적으로 모여살기 시작했다. 아카디안들은 바람이 많이 불고 배를 대기 힘들 정도로 여건이 좋지 않았던 이곳 체티캠프에 맨손으로 정착했던 용감했던 선조들의 얼을 기리며 아카디안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왔다. 아카디안들의 선조들은 독실한 가톨릭신자들이었으며 교회가 생활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1800
년에 첫번째 교회를 세우고 그 후 교회를 두 개 더 세웠다. 세인트 피터스 처치는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교회이다. 신부들은 학교와 병원을 세웠고 프랑스어를 말할 줄 아는 교사들과 간호원들을 모집했다. 체티캠프의 아카디안 생활에는 음악을 빼 놓을 수 없는데, 이는 아카디안들의 음악이 종교, 언어, 문화, 오락, 그리고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필자가 체티캠프에서 머문 아카디안 모텔의 주인에게 아카디안의 고유음식점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레스토랑 아카디안(Restaurant Acadien)을 알려주며 그 식당의 지하와 옆에 있는 박물관과 선물가게에 가면 아카디안 전통 공예품 등을 볼 수 있다고 소개해 주었다. 식당에 가니 아카디안 사람들이 친절하게 맞이해주며 웨이트리스가 자신은 프랑스 사람이지만 시댁은 아카디안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전통 아카디안 음식과 후식으로 나오는 블루베리 코블러는 맛이 좋았다. 아카디안 음식은 선조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여름에는 고기와 생선, 겨울에는 소금에 절인 고기와 생선을 주로 먹었다. 큰 솥에 고기나 생선 그리고 야채를 함께 넣고 천천히 요리
한 것이 흔했고, 야외에서 채집하는 베리는 누구나 먹을 수 있었다. 흔히 먹을 수 있는 아카디안 요리들로는 프리콧(고기나 닭고기를 튀겨서 다진 감자와 양파와 함께 끓여 만든 숲)과 챠드(Chiard, 감자, 야채와 고기를 넣고 천천히 만든 스튜)가 있다.

선물가게에는 손으로 직접 만든 다양한 크기의 벽걸이 융단 또는 양탄자가 전시돼 있었는데 체티캠프는 손으로 만든 양탄자, ‘럭후킹’(Rug Hooking)으로 전 세계에서 유명하다. 1927년 뉴욕에서 온 릴리안 버크가 체티캠프를 방문했을 때 양탄자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시장에 소개한 후
양탄자 산업이 빛을 보게 됐다. 체티캠프 출신의 엘리자베스 르포트 여사는 이 럭후킹으로 초상화를 만드는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녀의 작품은 바티칸, 버킹엄궁, 백악관 등에 걸려있다. 캐나다의 노바스코시아에 정착한 스코틀랜드인과 아카디안이 이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면서 그
들만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후대에 전수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점은 해외에 나와 살고 있는 한민족이 우리의 고유문화인 음식과 노래, 춤, 언어, 미술 등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잘 쓰고 간직하여 후대에 잘 물려주어야 한다는 한인 커뮤니티 차원의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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