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부모와 자녀들에게 구너하는 북미의 역사와 문화탐방
주 온경(데이비슨 애비뉴 초등학교 도서미디어 교사/새한국문화학교 디렉터)
아카디아는 1603년 프랑스 국왕이 북미의 위도 40도와 60도 사이의 지역을 식민지화하도록 허락한 후 북미에 처음으로 형성된 프랑스 식민지였다. 17세기에 60개의 프랑스 가정들이 아카디아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원주민이었던 믹맥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켰으며 그들의 사냥법과 어업을 배웠다. 아카디안들은 프랑스 식민지와 영국 식민지 사이에 걸쳐진 변경(개척지)에 살면서 중립을 지키며, 그 어느 쪽을 위해서도 무기를 들기를 거절했다. 그들은 프랑스 중도파로도 불렸는데, 1713년 영불 식민지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에게 프랑스는 노바스코시아에서 케이프 브레튼 섬을 뺀 아카디아의 일부를 양도하였다.
1754년 영국정부는 아카디안의 중도적 입장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영국에 충성하여 무기를 들 것을 아카디안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아카디안들은 프랑스 식민지에 살고 있던 자신들의 종족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기를 거부했다. 또한 영국에 충성하게 되면 로만 카톨릭인 자신들의 종교를 저버리는 것도 되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이에 영국식민지 통치자였던 찰스 로렌스 대령은 1755년 아카디아에 살고있던 아카디안들의 대추방을 명했다.
이 역사적인 대추방으로 4,000명 이상의 아카디안들(노바스코시아의 아카디안들 중 3/4 에 해당)의 집이 불탔고 소유지가 몰수당했으며, 그들의 가족들이 북미의 영국령 땅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프랑스로 돌아가기도 했으며 일부는 루이지애나로 내려가서 케이쥰(Cajun-아카디아(Acadia)출신 프랑스인의 자손인 루이지애나주의 주민) 인구를 만들었다.
체티캠프에 근거지를 잡은 아카디안들(I)
노바스코시아의 베덱에서 동북쪽으로 차를 몰다가 캐봇트레일을 한바퀴 돌아 케이프 브레튼 고지대가 끝나가는 기슭에 자리한 체티캠프는 세인트 로렌스만의 파도가 바위에 세게 부딪치는 곳으로 프랑스어로 열악한 항구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바람이 몹시 불어 배들이 항
구에 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동남쪽에서 주기적으로 강렬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시속 200킬로미터 이상으로 불 때도 있는데 체티캠프가 위치한 특이한 지형과 물의 온도에 의한 것으로 이 현상은 세계에서 두 곳에서만 일어난다고 한다.
필자가 체티캠프와 인근지역을 방문했을 때 이곳에 있는 모텔이나 집들에는 캐나다 깃발 옆에 파란색, 하얀색, 붉은 색의 프랑스 깃발과 비슷한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는데 이 깃발의 파란색 부분에는 노란색 별이 있었다.
이 별은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기는 1884년에 프린스 에드워드섬에서 열린 제 2차 아카디안 전국 컨벤션에서 채택되었다. 그 후 이 깃발은 17세기에 캐나다에 이민 온 프랑스인들이 모여살던 아카디아를 기념하며 아카디안들이 모여사는 지역마다 캐나다기와 함께 나란히 휘날리고 있다. 심지어는 아카디안들의 집앞의 벤치도, 바위도 같은 색깔과 디자인으로 칠해져있다. 이는 400년 전 캐나다의 아카디아에 정착했다 추방당해 각지로 흩어져야 했던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애쓰고 있는 아카디안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1755년 영국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해 뉴브런즈윅, 루이지애나 등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던 이들 아카디안들의 선조들은 마치 1910년 한일합방 전후에 만주로 떠났던 우리나라의 항일 지사들처럼, 또한 1920년 만주청산리 전투이후 일본의 조선문화말살정책이 강화되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연해주로 떠났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만 같아서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고 안쓰러운 마음과 더불어 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