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인광장- 냄비

2008-02-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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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십여 년 전 큰 형님이 컷코(Cutco) 회사에 잠깐 일하실 때 큰 맘 먹고 용량이 각각 다른 3개의 냄비세트를 들여놓았다.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비싼 가격이었지만, 막 입사한 형님의 실적을 올려주고 체면을 살려준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구실이 좋았다. 이런 핑계나마 만들어서 좋은 물건 한번 써보자 하는 얄팍한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몇 개월 동안 할부로 내면서 후회가 되지 않았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건강 음식을 제공한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만 했다.
이음새 없이 만들어진 냄비는 제 값을 했다. 큰 냄비는 많은 양의 국을 끓일 때, 중간 냄비는 라면 3개를 끓이면 적당한 크기로 각종 찌개를 끓일 때, 작은 냄비는 차를 마실 물을 끓일 때 안성맞춤이다. 일단 열이 가해진 뒤에는 진공상태가 되어 영양이 크게 손실되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원하는 요리를 할 수 있었다. 채소를 데치면 색이 변질되지 않았고 옥수수나 고구마를 삶을 때는 물을 많이 넣지 않아도 빠른 시간 안에 맛있게 익혀주었다. 다섯 식구에 냄비 세 개로는 약간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들곤 했지만 이리저리 궁리해가면서 별 탈 없이 지나왔다.
중간냄비는 그중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크기가 적당하여 냉장고에 그대로 넣어 보관할 때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아 좋았고, 내용물이 가득 담겼어도 무겁지 않아 허물이 없었다. 가끔씩 음식물이 타거나 눌어도 물에 담갔다가 몇 시간 후에 닦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것처럼 반짝였다.
오호 애재라. 그날은 무슨 날이었던가.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내가 새벽에 집을 나서면서 개스불에 얹어놓은 국을 잊었다 했다. 고약한 냄새에 일어나 보니 부엌이 연기로 가득 차고 냄비는 새까맣더라 했다. 잠에서 깬 큰 아들아이도 냄비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남편의 의견에 동의, 부자는 그것을 내다버렸다 했다. 아뿔사, 그날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날이었다. 그가 길거리에 내놓은 쓰레기통에 그 냄비를 넣자마자 트럭이 와서 가져갔다 했다. 중간 냄비였다!
나는 냄비의 최후 모습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손잡이도 멀쩡하고 뚜껑에 달린 꼭지도 그대로였단다. 그것은 냄비가 아직 건재하다는 뜻이다. 버림받을 만큼 망가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것은 그 냄비가 오랜 세월동안 수도 없이 일상으로 겪은 일이었다. 냄비의 재질은 병원 수술실에서 사용하는 철과 같이 특수 처리된 것이어서 언제나 원상으로 복구되었다. 늘 새것처럼 반짝여서 쓸수록 정이 들고 신기한 물건이었다. 맙소사. 차라리 손잡이랑 꼭지가 불에 녹아버렸다면 그나마 덜 서운할 텐데. 아니다. 그 냄비는 설령 손잡이가 없어도 꼭지가 없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아직 값어치가 충분히 있다.
나는 울부짖었다. 깜짝 놀란 남편이 그 냄비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 되물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집에 돌아온 나는 냄비가 정말로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만약에….” 라는 이유를 달아가며 신세 한탄을 했다.
왜 하필이면 나는 오늘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을까. 왜 평소에는 하지 않던 요리를 새벽부터 했을까. 왜 개스불을 끄는 것을 잊었을까. 왜 하필 나는 오늘 일을 가야 했을까. 왜 하필 남편은 그 냄비를 버렸단 말인가. 왜 하필이면 오늘 쓰레기 수거 날이었을까. 아니 남편이 냄비를 버리기 전 트럭이 왔었더라면. 가련한 그 냄비는 어두운 쓰레기 통 속에 잠시잠깐 갇혀 있다가 내 품에 안겼을 텐데. 아무리 냄새나는 쓰레기통이라 할지라도 나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맨손과 맨발로 기어들어가 냄비를 주어왔을 것이다. 평상시 온갖 일을 보고하고 의견을 물어오던 남편은 왜 하필이면 오늘따라 냄비를 버려도 되느냐, 묻지 않았을까. 대학에 가있던 큰아들은 하필 이때 집에 와있었을까. 평소에 사리판단 잘해주어 엄마의 인생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아이는 왜 건방진 결단을 내림으로 미련한 일에 애비와 한통속이 되었을까. 암 미련한 짓이고말고. 때 묻은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얇은 안목을 지닌 자네들에게 실망이 이만 저만 아닐세. 거짓에 가려 고통 하는 진리를 왜 깨닫지 못했을꼬. 두 사람 모두 마음이 연하여 혼자서는 결코 하지 못했을 일을 둘이 되고 보니 큰 용기를 얻었구나. 서로의 판단을 신뢰하여 잘한 일이다, 했을 것이다. 엄마가 이렇게 새까맣게 탄 냄비를 보면 속상해 할 것이니 우리가 미리서 없애버림으로 그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자, 했단다.
며칠동안 개스불을 켜지 않았다. 요리할 의지를 상실한 것이었다. 식구들은 시리얼(cereal)로 아침을 때우고 저녁에는 투고(Togo)된 음식을 먹었다. 냄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왔다. 남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여자라며 혀를 내둘렀다. 물질에 연연해하는 속물이 아닌 척 하더니 이게 웬일, 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 동네 쓰레기 처리장이 어딘지, 트럭 넘버가 무엇인지 당장 알아내어 “내 냄비” 찾아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똑같은 것을 사주마, 타일렀다. 더 분이 났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물질로 다스리려 하다니. 더구나 어찌 같은 냄비가 될 수 있을 손가.
신혼 초기에 남편은 내게 어머니날 선물로 붉은 사파이어가 세 개 박힌 예쁜 금반지를 사주었다. 무척 비싼 값을 치렀다는 기억이 난다. 어느 날 한 살 된 큰아이가 보이지 않아 집안을 이리저리 찾던 중 화장실에서 그 아이를 발견했다. 나는 그때 보았다. 변기 안 물 속에 잠겨서 영롱하게 어른거리고 있는 반지를. 내가 놀라서 그 반지를 집으려는 찰라 아이가 변기 물을 내려버리고 그 반지는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져 들어가 버렸다. 그땐 잠시 어이가 없었을 뿐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 뒤 한번도 그 반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좋아하고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지금까지 어디 한두 번이던가. 물건에 담긴 의미를 좇아, 혹은 정든 기간에 따라 그 상실로 인한 아픔의 농도가 달랐다. 냄비를 잃고 그토록 속이 상했던 것은 아마도 오랜 시간 들인 정 때문이리라. 혹 아직 다 하지 못한 인연 때문인가. 오래도록 사용하다가 딸아이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다, 생각했던 물건이었다. 또 있다. 내가 원해서, 나의 의지로, 혹은 나의 실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의로, 그것도 사리판단이 미숙한 아이도 아니고 타인도 아닌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발생된 상실에 대한 분노 때문이리라.
며칠 후 남편이 인터넷에 그 냄비를 주문하면서 값이 기백불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제야 내 기분을 알 것 같다 했다. 아니다, 돈 때문이 아니다, 항변하고 싶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서글픔으로 입을 꼭 다물었다. 마침내 냄비가 도착했다. 냄비는 잃어버린 것과 같은 모양이 아니었다. 크기는 물론이고 뚜껑에 달린 꼭지랑 손잡이도 달랐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보고 선택한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잃어버린 것과 같은 모델은 더 이상 만들지 않는 모양이다. 한동안 찾았으나 비슷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막내아들이 포장을 뜯어주며 단숨에 말했다. “엄마, 냄비 모양이 다르다고 아빠한테 불평하지 마세요. 이건 아빠가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잖아요. 선물 가지고 불평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래 아들아. 네 말이 맞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똑같은 것으로 대체한다 해도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차라리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자. 똑같은 것이면 옛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릴 염려가 있다. 예의가 아니지. 새 그릇은 또 무슨 죄냐. 정을 주어야지.
며칠 후 라면담당 막내아들이 또 말했다. “엄마, 지난 번 냄비로는 라면을 세 개 밖에 끓일 수 없었는데 이것으로는 다섯 개까지도 넉넉히 끓이겠더라고요. 전에는 부족하듯 했는데 이제는 먹고 싶은 만큼 넉넉히 끓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내 말이 맞지, 누나?”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딸. “당연하지. 엄마, 아빠는 무고해. Mom, he was innocent.” 모두 지 애비 편이로구나. 그래, 냄비가 인생의 다는 아니지. 사랑을 잃은 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사건이려니. 잃어버린 친구, 잃어버린 관계로 가슴앓이를 한 적이 언제였던가.
같은 모양의 냄비 세트 사이에 불편한 모양새로 앉아있는 새 냄비를 볼 때마다 옛 친구, 새로운 관계를 생각한다. 조화다. 인생은 이렇게 다른 모양과 다른 시기에 만난 사람들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언젠가는 이러한 이물감이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언제 내가 잃어버린 냄비 때문에 마음 아파했던가,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작은 일에 연연해했던 사실을 부끄러워하면서, 가소로워하면서. 마치 다 큰 사람처럼. 큰 도(導)라도 깨달은 것처럼. 옛것은 그렇게 잊혀져가고 새것이 그 자리를 메워줄 것이다. 더욱 빛나는 모습으로.
나도 언젠가는 옛사람으로 분류되어 작은 공간으로 삶의 궤도가 한정될 것이다. 그럴지라도 자유를 느끼려면, 마음이 아프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마음공부를 해야겠다.

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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