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학부모 칼럼-겸손: 자랑해야만 하는 마음

2007-11-19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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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
자녀가 이를 깨닫도록 인도해야

덴젤 워싱턴과 러셀 크로우가 주연한 ‘미국인 조폭’ (American Gangster)을 관람했다. 나름대로 인상적이었던 것이 겸손에 대한 교훈이었다.
프랭크 루카스라는 흑인 두목이 기득권을 장악하고 나서 시골 고향에 있는 온 가족을 다 불러들이는데, 동생 하나가 뻐기느라고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 모습을 보고 형 프랭크가 대노하며 “그 꼴이 무어냐, 마치 경찰에게 ‘나를 체포해주쇼!’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구나!”라고 꾸짖는다.
그랬던 그가 나중에 결국 경찰에게 꼬리를 잡혀 형을 받게 되는데 그 발단이 바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가 밍크코트를 세트로 사가지고 와서 너무 좋아하기에 잠깐 방관하는 마음으로 권투시합에 입고 가는 사건이다.
그것이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일까 할지 모르지만 그 권투시합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알리-프레지어 챔피언 결정전이다.
화려한 밍크코트를 입고 구경간 것이 당시의 실세의 위세를 잔뜩 부린 꼴이 되는데 그 모습이 조폭세계의 동향을 주시하는 형사의 눈길을 끈 것이다.
그 때까지는 낮은 자세를 지키고 있던 그가 일순의 부주의로 제일 이목을 집중하는 시합에 제일 화려한 옷을 입고, 제일 좋은 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심각한데, 마침 뒷자리로 밀린 이탈리안 마피아의 두목이 비굴할 정도로 꼬리를 내리는 식의 인사를 해왔고 이것이 형사의 카메라에 그대로 잡히고 마는 것이다. 잠깐 잃은 겸손이 그의 발목을 잡히게 하는 올무가 되서 돌아온 것이다.
이와 반대로 겸양이 가지는 “파우어”에 대한 에피소드도 하나 있다.
필자가 모회사에 몸을 담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인데, 그 회사가 나중에 결국 미국의 양대경쟁업체를 흡수 합병할 수 있게 되었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미국 서해안에서 가장 크고 견실한 공급처를 확보했을 때라고 필자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그 때 그 역사적인 첫 계약은 첫 거래로는 조금 규모가 커서 공장장 겸 부사장이 직접 상대를 해주었었다. 그런데 물량과 가격, 인도조건, 그리고 지불조건 등 세세한 사항에 다 합의하고 이제는 서명만 하면 될 단계까지 되었을 때 그는 인터콤에 대고 무엇이라고 했고, 우리가 들어 온 문이 아닌 다른 조그마한 문으로 누군가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것이다.
여태까지 얘기하던 부사장은 가끔씩 인터콤으로 누군가 상의를 하곤 했었는데 아마 이 사람이 그 상의를 받아준 당사자였으리라. 명함을 받아보니 명함도 부사장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간단했고 아무 직함도 전화번호도 없이 단지 이름석자만 적혀 있었는데 그 성이 회사이름과 같았던 것이다. 바로 그가 그 회사의 사장이었던 것이다.
부사장은 정장차림에 이것저것 위세도 많이 부렸었지만 이분은 옷차림도 스포티한 골프티 정도이고 구차한 수식어도 없이 잠잠한 미소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 부사장의 요란스러울 정도로 큰 사무실이 초라해 보였고 조금 전까지도 멋있어 보이던 그의 정장의 모습은 사장의 골프티에 비해 한낱 머슴의 유니폼 같이 처량하게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랬었는데 잠깐 인사가 끝나고 사장끼리 계약서에 서명이 끝난 후에 또 한 명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그는 흰머리에 아주 수수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방금 서명을 한 사장을 포함해서 모두가 일어나 자리를 피하며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 회사의 창시자이자 진짜 지주이며, 그 사장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앞서 말한 프랭크 루카스의 겸손은 자기관리 차원의 ‘보호색’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부당한 방법으로 쌓은 부와 권세였기에 늘 그늘에 살아야 하는 신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 주인 부자의 ‘겸손’은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쓰지 않고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일종의 가진자의 ‘특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와 또 다른 종류의 동양적 ‘겸손’은 전통적으로 강요되는 때와 ‘가식’일 때가 많다. 모른다고 그래서 열심히 가르쳐주었는데 알고보니 훨씬 고수였다던가, ‘마치 사자가 발톱을 감추듯’ 있어도 필요할 때까지 감추고 있는 ‘작전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또 다른 차원의 의미가 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을 위해 욕심을 부리며 이것저것 다 가져본 솔로몬 왕이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그에게 만족을 줄 수없는 “헛된 것”(전도서 1:1)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사도바울은 세상에서 높게 보는 것들이 소위 “배설물”(빌립보서 3:8-9a)과도 같다는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진짜로 필요로 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거저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인데(전도서 12:11), 그 때 느낄 수 있었던 포만감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느끼는 겸손이고 이 겸손은 나는 낮추지만 동시에 그 크고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자랑하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드는 것이다.
바울사도가 말했듯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7)라고 했는데, 이런 ‘겸손’을 아는 자녀는 생전 명품은커녕 학교 행사 때마다 드레스며 구두를 빌리느라 소란을 피우면서도 조금도 비굴함을 느끼지 않는 자녀가 되는 것이다.
전화: (213)210-3466
황석근 목사 <마라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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