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상상력이 낳은 작품
2007-08-11 (토)
캐비닛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펴냄
172일 동안을 자고 일어난 토포러(toporer)들, 잃어버린 손가락 대신 만들어 넣은 나무손가락에 살이 붙고 피가 돌아 육질화(肉質化)되어가는 피노키오 아저씨, 남녀의 성기를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 몸의 일부에서 도마뱀의 형질을 나타내는 사람,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시간을 잃어버리는 사람 등 누가 들어도 ‘구라’라고 여길만한 사람들, 이들을 작가는 ‘심토머(symptomer)’라 부른다.
기이한 현대사회에 너무나 현실적으로 적응한 나머지 모습과 특성까지도 기이해져버린 사람들인 ‘심토머’, 그리고 그 ‘심토머’와 관련된 파일을 정리하고 ‘13호 캐비닛’을 관리하는 ‘공대리’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심토머에 관한 특이하고 기이하고 섬뜩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며 작가는 끊임없이 이것은 ‘평범한’ 이야기라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은 어느새 믿지 못할 일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기억을 부정하며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사람들이 어디 소설 속에만 있겠으며 사람이기보다 차라리 고양이가 되고 싶고 차라리 나무인형이 되고 싶은 고통스런 인간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다른 누구에게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를 혹은 자신의 분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 또 얼마나 많은가.
기발하면서 엽기적이고 매우 과학적인 사실 같으면서도 사실은 순전히 ‘구라’일 뿐인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 속에 깃든 현실의 투영은 작가의 상상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며 역설의 힘이 갖는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기에 작가의 괴물같은 기발한 상상력에 동감한 많은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제12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나보다. 그저 그렇고 그런 얘기들, 뻔히 짐작이 가는 얘기들에 실증이 난 독자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이형열(알라딘 서점 대표)
www.aladdin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