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어는 사양합니다”

2007-07-0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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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당신이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천호역에서 광화문까지 간다고 하자. 그리고 40대 서양남자가 당신 옆에 앉았다고 하자. 몇 분 후 그가 두꺼운 수학책 하나를 꺼냈다고 하자. 한국어 제목으로 ‘대수의 기초개념’이다. “응? 요놈이 지금 뭐하는 거야? 도대체 뭐하는 친구지? 이 친구 정말 이 한국어 책을 이해하는 거야?” - 당신은 그에게 말을 걸겠는가? 나는 당신이 제발 그래 주길 바란다.
나는 약간 내성적인 사람이다. 사람들 얘기 듣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긴 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한다. 적어도 영어로 말하는 경우엔 그렇다.
하지만 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처럼 내가 조금만 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경우라면 그 말들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잔뜩 신경을 곤두 세워 말해야 할지라도. 물론 상대방은 내 말이 결코 유창하지 않아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상당히 참을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애써 그런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 고백하자면, 서울에서 지하철을 탈 때 한국책을 옆에 꼭 끼고 있는 이유도 내가 먼저 말 걸기가 쑥스러워 누군가가 내 책을 보고 먼저 말 시켜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 간의 긴 비행기 여행에서도 이런 트릭이 통할까? 불행하게도 그렇지가 못하다. 내 옆엔 결코 한국인이 앉지 않기 때문이다. 잘 모르긴 해도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노스웨스트의 비행기 좌석 예약시 서양인은 꼭 서양인과, 한국인은 한국과만 앉히는 원칙이 있는 게 확실하다.
1991년에 단 한번 한국인과 함께 앉아 왔는데, 그것도 딴 자리에 앉으셨던 한국인 장모님과 자리를 바꿨기 때문이었다. 옆에 앉았던 사람은 직업이 교사라는 젊은 한국인이었다. 서울에서 LA를 가는 12시간 내내 얼마나 재미있게 얘기했는지 모른다.
한국어로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겨도 생각대로 일이 안 풀리곤 한다. 불행하게도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인들과는 영어로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듣는 경우엔 특히 그렇다(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이 미국인과 한국말을 하는 게 수준 이하처럼 보여진다고 느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어권 나라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들의 영어가 내 한국어보다 훨씬 나은 건 사실이다.
5개 정도의 간단한 한국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외국인들은 한국인들과 대화하며 아주 훌륭한 대접을 받는다. “한국말 잘 하시네요!”라는 칭찬을 들으며 영어대화 속에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한국어를 유창하게 해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한국어 문장을 5개 보다는 많이 알아서 간단하게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하긴 해도 더듬거려서 참을성이 요구되는 외국인들을 놓고는 어찌 상대해야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내 경우엔 아무리 한국말로 말을 해도 되돌아오는 답은 영어다. 한국인들은 그게 얼마나 재미없고 슬픈(?) 일인지 모른다.
지난 주 결혼 20주년으로 아내와 아르헨티나에서도 최남단 도시인 우슈아야에 갔었다. 여행 전 숙소의 주인과 스페인어로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도착한 후에도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어 영어를 못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영어선생이었다. 몇 년전 플로리다에 교환학생으로 왔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말을 하는 일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내게 스페인어를 고집했던 것이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지하철이나 비행기에서 한국 신문, 한국잡지 등을 들고 있는 외국인을 보면 말시켜 주길 바란다. 일곱살짜리 수준의 단어들로 말하려니 좀 바보스러워 보여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자기의 한국어를 확인하면서 대화하는 그는 당신이 참을성 있게 대화해주는 것을 아주 고마워할 것이다. 우리 미국인들은 영어가 아닌 말은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로 유명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자꾸 당신의 모국어로 우리를 계속 밀어 부쳐주길 바란다.

케빈 커비 /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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