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과 미국 - 중국 꽹과리와 버드나무

2007-06-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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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내가 국민학생 때였다. 우리 가족이 아침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할 때면 아버지는 항상 AM 라디오의 뉴스를 틀어 놓으셨다. 매일 아침 7시40분이 되면 똑같은 광고음악이 흘러나왔다.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 중국식 꽹과리 소리가 크게 울림 -- “…비행기”. 여섯 살짜리 나는 이 이상한 단어 “오리엔트”가 뭔지 아주 궁금했다. 왜 그 말 뒤엔 항상 중국식 꽹가리 소리가 따르는 걸까? 어머니는 이렇게만 일러 줄 뿐이었다. “아주 멀고도 먼 곳”.
며칠 후 18살짜리 아들이 처음으로 혼자 한국에 간다. 아이는 동양을 자주 접했기 때문에 동양문화를 대하면서 자신감 있게 행동하고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이의 그런 태도는 중서부 미국아이였던 내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고립되게 컸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한국인들은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바깥 세상를 모르고 관심도 두지 않았던 자신들을 우물 안 개구리라 표현했는데 실은 나도 40년전엔 디트로이트의 개구리에 불과했다.
나는 14살이 될 때까지 어떤 동양인도 알지 못했고 동양인을 아는 사람도 알지 못했다. 내게 동양이란 “버드나무 홈세트” 로 알려진 하얗고 파란 우리집 접시에 그려진 중국 그림이 전부였다. 전통 중국식 집이 있고 그 옆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기울어져 있으며 나이팅게일 새들이 날라 다니는 그림이었다. 동양이란 노스웨스트 광고음악의 커다란 중국 꽹과리가 내는 웅장한 소리뿐만 아니라 피아노 소리이기도 했다.
동생과 나는 어렸을 때 “중국 음악”을 연주한답시고 피아노 검은 건반 여기저기를 마구 누르면서 장난을 치곤했다. 어린아이들 귀에도 오음계 음악과 중국을 연관시킬 수 있었나 보다. 텔레비젼 만화에서 보고 들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또 하나의 동양 나라 ‘한국’이란 이름을 들었었다. 우리끼리는 ‘아빠가 죽지 않은 곳’으로 통하는 그곳은 아무 것도 상상해낼 수 없는 신비하기만 한 곳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군인이셨는데 한국으로 파견 되기 직전에 노래를 잘 한다는 얘기를 들은 한 대령이 군합창단으로 배속시켜 독일로 가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전쟁의 공포로부터 대탈출한 사건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영재수학 수업을 듣게 되면서야 동양인-당연히-을 알게 되었다. 그 반에 부모님이 대만에서 이민 온 잭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대학에 가 좀 더 출세(?)를 하여 처음으로 만나게 된 한국사람은 수학교수 -이 경우도 당연히-였다. 내 아들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동양과 서양이 하나가 되어진 일품(一品)이다. 대단히 부럽다. 두 문화에서 똑같이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이 ‘혼혈아식 품성’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순수한 목표가 아닐까 싶다.
아이는 태평양을 6번이나 오갔다. 이에 대해 내가 부모로서 반사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아이가 얼마나 운이 좋은가에 대한 질투다. 그리고 아이가 그 모든 상황을 특별하게 감사하는 것 같지 않아 공연히 짜증도 난다. 14살이 되도록 외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고 28살이 되도록 태평양을 건너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런 질투와 짜증 저변은 아이를 위한 기쁨에 꽉 차 있다.
‘한국스러움’은 아이의 머리 속 깊게 뿌리 박혀 있다. 우리와 얘기할 땐 영어 속에 자연스럽게 한국 단어를 군데군데 넣어가며 말하고, 한국인 이민사회 속의 유머러스한 얘기를 노래하는 LA한인 2세 힙합 그룹의 CD를 들으며 깔깔 거린다. 아이의 미국인 친구들까지도 대개는 오래전부터 김치를 먹고 삼성 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한국영화를 본다.
이 세대들에게 “아주 멀고도 먼 곳”은 어떤 의미를 지닌걸까? “아주 멀고도 먼 곳”이라는 개념 없이 자라는 이 세대들에게 무언가 부족한 게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이 가면 절로 밝혀지리라.

케빈 커비 /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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