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주령’이 미국 와인산업 망쳤다

2007-06-1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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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33년 알콜음료 제조·배포·판매 금지
가주 와인산업 큰 타격… 70년대까지 암흑기

“미국 것은 뭐든지 크더라” 미국을 방문하면 한마디씩 던지는 말이다. 우선 콜라부터가 한국 것보다 크다. 자장면은 훨씬 많이 준다. 쟁반 위에 수북이 담겨 나오는 불고기 1인분에 입이 벌어진다. 쌀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른다. 밥을 추가해도 밥값 받는 식당이 없다. 햄버거 샵에 가면 냅킨이든 케첩이든 달라는 대로 돈 안받고 준다.
사실 그렇다. 넓고 비옥한 땅덩이에 기후까지 다양해 아기자기한 한국 것 보다 크고 기름진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유럽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도 미국의 크고 후한 인심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런데 이렇게 비옥하고 넓은 땅덩어리를 가진 미국인데 왜 와인은 후발주자로 달려가는지가 궁금하다.
미국의 ‘금주령’(Prohibition)이 원인이다. 격변의 20세기 초반 아직 사회적 균형을 잡지 못하던 미국은 유럽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가게 된다. 술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미국은 당연히 사회 안정을 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정한 것이 금주령이었다.
1920~1933년 13년간 지속된 미국의 금주령은 미국, 특히 와인의 최적 산지로 주목받던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을 초토화 시켰다.
여러 가지 부작용으로 인해 금주령이 폐지되면서 미국의 와인 산업은 다시 불씨를 당기게 되지만 이미 황폐해진 와인 산업의 중흥을 이끌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다. 무려 40년 가까이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 금주령
연방 의회는 1919년 초 알콜음료의 제조, 배포, 판매 금지를 골자로 한 수정헌법 18조를 비준했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전국민들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의회가 무턱대고 술 판매를 금지한 것만은 아니다. 당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사회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는 고약한 유럽식 술버릇이 팽배해 있었다. 살인, 강도 등 강력범죄가 야기된데다가 술중독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속출했었다. 더군다나 당시 미국에는 술을 판매하는 ‘살롱’이 수도 없이 번성했다. 국민 150~200명당 한 개꼴로 있었다니 엄청난 흥행이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는 1890년대 중반부터 ‘반살롱 연합’이라는 사회단체까지 결성돼 본격적인 금주 운동을 전개했다.
살롱은 술만 파는 것이 아니라 매상 증대를 위해 도박, 매춘까지 서슴지 않으며 고객 유치에 혈안이 되었다. 각 주별로 금주 운동이 불을 뿜게 되자 연방의회가 칼을 뽑고 나선 것이다.
금주령은 1920년 1월16일부터 시행되게 되었다. 이에 의회는 시행을 앞당기는 소위 ‘볼스데드 법령’을 비준해 1919년 10월28일부터 즉시 시행에 들어간다.
이 법령에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의학이나 종교 의식을 위한 술 생산은 허용함과 동시에 한 가정당 연간 200갤런의 가내 와인 생산은 가능케 한 것이다.
▲와인과 금주령
금주령이 떨어지자 와인 생산 업체 곳곳이 문을 닫게 된다. 의욕이 떨어진데다가 정부가 주정 면허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는 와인 산업이 무너지면서 포도 재배업이 또다른 흥행에 돌입하게 된다. 독주 생산 및 판매 금지로 알콜 부족기를 경험한 주당들이 와인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더군다나 가구 머리수(여성은 제외)당 200갤런의 가내 생산을 허가한 것 때문이었다.
와인 생산이 막힌 캘리포니아는 포도를 수확해 와인 인구가 밀집돼 있는 동부로 보내기 시작한다. 뉴욕, 시카고 등 유럽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몰려사는 대도시 역마다 캘리포니아에서 실어오는 포도를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집집마다 와인을 지하 저장고까지 마련해 와인을 만들기에 혈안이 된다.
그런데 기차에 실려 먼길을 가려면 질 좋은 포도로는 곤란했다. 껍질도 두껍고 단단한 와인이어야 장거리 여행에도 상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는 좋은 포도 다 접어두고 껍질 두꺼운 카리얀느, 알리캉트 부셰 등의 튼튼한 포도 품종을 생산하게 된다.
13년의 긴 세월동안 미국에는 마피아 등 갱단들이 장악하는 알콜 밀매가 번성하면서 범죄가 급증하게 되었고 와인 산업은 초토화 됐다.
기나긴 금주령이 막을 내린 후 다시 와인 붐을 타게 되지만 경험있는 와인 생산자들은 거의다 떠나버린 뒤였다. 새로 와인산업에 뛰어든 사람들은 경험부족으로 발효시기를 놓치기도 했고 발효가 진행되는 와인을 담아 팔았다가 마켓 진열대에서 폭발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는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결국 미국인들이 와인을 외면하게 되면서 미국의 와인 산업은 1970년 초반까지 수십년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김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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