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문화와 삶에서 나오기 때문에 삶과 문화가 다르면 언어도 다릅니다. 그 다른 언어를 번역할 단어가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情)은 단순한 ‘사랑’으로 번역될 수 없는 함축적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love’나 ‘affection’은 한국인의 심성 깊숙이 들어있는 ‘정’을 표현하지를 못합니다.
‘한’(恨)도 마찬가지입니다. bitterness, resentment, sadness, hatred 등 어떤 영어 단어도 한국인의 정서 그 깊은데 있는 ‘한’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한은 슬픔이나 미움과 다릅니다. 한국인들에게 맺힌 것 중에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중의 하나가 ‘한 맺힌 사연’입니다. “‘주
눅’이 들었다”라는 문장에서 ‘주눅’을 번역할 때 “become diffident”나 ‘self-distrust’ ‘timidity’ 또는 ‘inferiority complex’로 표현 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정, 한, 주눅은 한국 사람만이 한국인의 문화와 정서에서 이해되는 깊이가 있기에 미국사람들의 습성과 문화 속에서 이해되어지지 않습니다. 이 단어들은 제가 지은 말로 ‘문화 속에 끼어있는 언어의 림보 상태’(linguistic liminality among the different cultures)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장합니다. “영어 논문이나 학설에 정, 한, 주눅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번역하지 말고 고유 명사처럼 ‘Jung’, han’, ‘Ju nuk’으로 표기하여야 한다” 버지니아 공대 사건의 가운데에 있는 조승희 군은 어린 시절 미국 생활에서 주눅이 들었습니다. 한국 악센트가 있는 영어 발음은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한’이 싸이기 시작했습니다. 남편 때문에 속을 썩어 ‘한’을 품은 여인이 그 ‘한’을 풀어보려고 놋그릇을 재로 닦고, 닦은 그릇 꺼내어 또 닦아도 그 ‘한’은 그대로 침전됩니다. 조 군은 32명을 죽이는 것으로도 ‘한’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한 맺힌 삶’을 마감했습니다.
주눅 들고 한 맺힌 우리 이민자의 자녀들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조 군은 남의 자식이 아니라 ‘우리의 자식’입니다. 평범한 이민자의 가정의 자식입니다. ‘정’은 미움을 삭이면서 품어줍니다. 아픔도 껴안으면서 품어줍니다. ‘정’은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품어줍니다. 죄짓고 하나님 마음 아프게 한 우리들에게 독생자를 보내어 품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어의 ‘love’ 보다는 ‘정’으로 표현함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이민 사회에 끈적끈적한 ‘정’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에셀 나무를 심으며…
글 : 호성기 필라 안디옥 교회 담임 목사
삽화 : 오지연 일러스트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