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두껍고 높은 벽을 쌓았어요’
2007-04-30 (월) 12:00:00
시한폭탄 지닌 이들 무장해제 묘책은
버지니아 공대 총격참사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 나는 학교 사무실에서 한 남학생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학업에 관한 지도를 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을 상담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가끔은 심각한 신상문제에 대한 상담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 날의 남학생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평소에 공부도 잘하고, 인사성도 밝고, 성격도 명랑한 편이어서, 내심 귀엽게 생각하고 있던 학생이었는데, 올해 들어와서 결석이 잦아지고, 성적이 하위권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무슨 연유이냐고 물었다.
사정을 듣고 보니,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일 뿐,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난감하였다.
친아버지는 자기가 두 살 때 엄마와 어린 자기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린 후에 소식도 끊어졌다고 했다.
그 이후 엄마는 현재 계부와 결혼을 했고, 자기는 이들과 함께 살다가 1년 전에 집을 나왔다고 했다. 아직 미성년이므로 소셜워커의 도움으로 그룹 홈에 들어가서 살다가, 다른 입주학생들과 마찰이 생기는 바람에 새 그룹 홈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러는 도중에 공부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자기를 버린 친아버지도 못된 인간이고, 자기를 구박한 계부도 못된 인간이고, 계부에게 동조하는 엄마도 못된 인간이라고 했다.
그 다음에 한 말이 더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저는요, 제 주위를 빙 둘러서, 단단한 벽을 쌓고 살아요. 그 벽은 두껍고 또 높은 벽이에요. 아무도 그 벽안으로 들어올 수 없어요.”
“얘, 나에게는 그 벽 좀 낮출 수 없겠니? 어려움이 닥칠 때 가끔 와서 얘기를 나누면 의외로 마음이 가벼워질 수도 있을 거야.” 미소만 띠운 채 아무 대답이 없다.
“너는 원래 똑똑한 애니까, 긴 얘기를 안 하겠어. 너 ‘잘 사는 것이 최선의 복수’라는 말 들어보았지? 네가 지금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 원망과,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것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너는 다른 점에서 운이 좋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니? 너는 건강한 신체, 좋은 머리, 명랑한 성격이라는 세 가지 귀중한 자산을 가지고 있어. 이 귀중한 자산을 십분 활용하면서, 한번 성공해 보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멋지게 성공해서 모든 사람에게 한번 ‘여봐라’ 하고 보여주고 싶지 않니? 네가 잘 되어야지 또 많은 불우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 않겠어? 우선 학교를 졸업할 수 있도록 다시 공부에 열중하기 바란다.”
이같은 상담을 한지 일주일 만에 버지니아 공대의 참사가 일어났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직한 범행에 충격을 받았고, 그 범행을 저지른 범인이 한인 학생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범인의 정신 상태와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의 진단이 나왔지만, 범인 자신이 죽은 마당에서 이 모든 설명은 진정한 원인의 근사치에 불과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남의 생명을 뺏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악행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충격이 가라앉은 요즈음 나는 ‘주위에 높고 두꺼운 벽’을 쌓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 담 안에서 분노와 증오, 자기혐오와 절망으로 뒤틀린 영혼이 언제 어떻게 바깥세상을 향해서 폭발을 할지 생각하면 무섭다.
이 높고 두꺼운 담을 허물어서, 그 안에 움츠리고 있는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따뜻이 감싸야 하는데, 과연 이 일을 누가, 언제부터, 어떻게, 실천해야 할는지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김 순진 <밴나이스 고교 카운슬러·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