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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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크로 ‘관공서와의 관계’

2007-04-1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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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지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
이런 말들은 100% 한국말이지만 꼭 우리끼리만 통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민 1세는 물론이고 1.5세나 2세들에게도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인식부족으로 자녀들 성공만 바라보고 고생한 부모님들께 아직 그리 인기 있는 직업이 아니어서인지 곳곳에서 한인 직원과 만나는 행운은 쉽지 않다.
말꼬리를 길게 혹은 아주 하이 톤으로 굴려버리는 흑인 공무원이나 심한 액센트를 써서 가뜩이나 영국식 영어에 익숙한 이민 1세들에게 더욱 혼란을 주는 중국계나 동남아 출신의 공무원들과의 만남은 늘 긴장의 순간이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의 설명을 듣는 것은 일단 포기하고 준비해간 서류로 우리의 용감한 셀러나 바이어들의 설전이 시작된다. 시청은 물론이고 주 조세형평국, 노동국 등 사업체의 시작과 마무리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정부 기관들과 전투태세로 임하는 우리 고객들과의 피할 수 없는 만남은 그래서 늘 고달프다.
사업체 매매 에스크로를 오픈하고 클로징 할 때마다 셀러나 바이어들에게 필요한 서류와 함께 잊지 않고 한결 같이 강조하는 것이 관공서와의 좋은 관계이다.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과 실없이 웃는 것도 어색하고, 말끝마다 마담 혹은 Sir Please도 잘 안 나오고,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는지 운 나쁘게도 내게만 퉁퉁거리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도 못하겠다는 것이 대부분 고객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반대로 가끔 만나 식사도 하는 시 공무원인 타인종 친구의 말을 빌리면 그 상반된 반응이 참으로 재미있다. 백인들은 입술이 얇아서 좀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말을 예쁘게 해서 너무도 Sweet Talker들이고, 눈도 작아 화나 있는 것 같은 데다 입도 퉁명스러워 보여(흑인인 본인의 입은 더하면서) 왠지 싸우러 작정하고 온 사람들 같아서 자신들도 긴장을 한다고 했다. 더욱이 자신들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같은 말만 되풀이하여 정말 짜증이 날 때도 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하소연을 하여 겉으로는 경청을 하였지만 한 때 쥐어박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회계사무실에서 서류 완벽하게 준비해 갔는데 갑자기 이해도 안 되는 겁나는 용어가 나오면 너라면 안 그러겠냐?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우리 한인들은 속 깊은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고 입에 바른 ‘Butter up’ 칭찬도 잘 못하고 영어도 문어체 영어를 위주로 교육을 받아서 실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변명을 힘주어 강조하지만 늘 손해 보는 우리 손님들 생각에 속이 상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실제 에스크로를 통해 요구되는 필요한 서류나 손님에 대한 지적 사항은 너무도 간단한 것이어서 그 자리에서 메모에 써주면 좋으련만 차후에 통보하겠다는 등의 의례적인 처리로 일관할 때가 많아 손님들이 애태울 때가 종종 있다.
하루에도 여러 만나는 타인종 손님들 중에는 하도 다정하게 인사를 하여 전에 에스크로를 클로징한 손님인가 열심히 기억을 더듬다 보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자연스레 우리도 오랜 친구처럼 대하면서 부드러운 관계가 이루어진다. 3분 늦었는데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여, 30분 이상을 약속시간에 늦어 점심시간을 놓치게 만드는 우리네 손님들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동료들과의 계획된 점심에 빠진 어린 오피서에게 셀러나 바이어에 대한 불만사항이나 불평을 하소연하는 타이밍 못 맞히는 손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다음 약속 손님이 기다리고 점심 굶은 오피서에게 자신을 홀대하는 것 아니냐고 억울한 소리하고 나가 버리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의 텃밭에서 키운 상추를 한 봉지 싸다 주면서 미안한 마음을 푼 그 손님에게 빈말로라도 다정다감했던 타인종 손님보다 더 인간적인 정감이 가는 건 왜일까?

제이 권 <프리마 에스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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