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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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쓰는 편지

2007-03-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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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하고 광활한 사막의 풍경을 몇시간 째 달려왔습니다. 사막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하지만 모든 것이 태고적 고요와 생명으로 살아있습니다. 자신속의 야성을 다시 만나기 위하여 사막에 옵니다. 갈색과 연록의 부드러운 변화들을 보며 섬세함을 배웁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장대하게, 끝없이 펼쳐지는 이 신선한 땅에서 태초의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끼던 경이와 황홀한 행복을 느낍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였을, 그토록 잔인하고 또한 아늑한 땅, 숭고함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 신성한 땅에서 태초의 야수적 인간이 느꼈을 그 하나 됨을 느끼고 싶어 사막에 누워 잠듭니다.
저 드넓은 대지에 말을 타고 달리던 인디언들의 한없는 겸허함으로 바라봅니다. 무한한 허공, 먼지처럼 작은 자신, 그리고 저 광대무변한 우주의 광활한 마음조차 다 담을 수 있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고요함 중에 밝은 밤 입니다.
별들이 우박처럼 쏟아집니다.
바구니에 한 아름 담을 수 있을 것 같이 가까이 쏟아져 내립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이 거대한 자연의 위용 앞에서 그토록 아늑한 다정함을 느끼는 것은 웬일일까요. 어머니를 떠나온 지 30년, 어른이 되어,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수 없이 쓰러지며 다시 일어나 살아온 시간 중에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줄도 몰랐다는 것을, 사막에서 자던 첫 밤에 느꼈습니다. 너무나 따뜻하고 아늑해서 어머니 품에 다시 안긴 것 같았습니다.
문명이 들어서지 않은 깨끗한 대지에 수천년 동안 태양으로 달구어져서 그럴까요? 사막은 정결한 땅입니다. 사막에서 자고나면 몸과 마음이 치유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 신성한 땅에 자주 오는 이유는 LA에서의 일상과 해야 할 일과 모든 관계들이 모두 신기루처럼 느껴지고 살기위하여, 살아내기 위하여 그토록 중요하게 느껴지는 일들이 별거 아니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씻긴 듯 깨끗해진 마음으로 다시 도시로 돌아가 살아낼 에너지를 갖기 위해 이곳에 옵니다.
쏟아지는 별밤아래 잠드는 일, 새벽의 청명한 공기, 대낮의 뜨거운 열기, 벗들과의 대화는 제가 이민 와서 하는 일 중에 가장 멋진 일입니다.
장엄한 대지와 대기 속에서 시를 읽는 것 또한 하나의 시처럼 느껴집니다.

달빛이 종이보다 희길래
마음을 들어 그 위에 편지를 쓴다.
구름아 가리지 말아다오
누구나 그 달하나 가슴에 품고
한 생애 살다 나 오늘 이렇게
짧은 겨울밤 너와 같이 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사막
어둠의 들판 잃어버린 시간따라
우리 만남이 다시 풀꽃으로 태어나서
서로 눈을 마주 보았네
출렁이는 가슴 파도소리
별들이 반짝이는 어둠에서
우리들의 가슴속에 보름달이 기우네
<신 헬렌 ‘달빛에 쓴 편지’>


박혜숙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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