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우리 말 사랑
2006-10-28 (토)
올해는 구보 박태원(1909-1986) 서거 20주년이 되는 해다. 그가 청계천 빨래터의 얘기로 시작되는 ‘천변 풍경’(1936)을 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과연 청계천이 성공적으로 복원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서울에 대한 세태와 언어 묘사로 이 대도시를 문학 작품 속에서 불멸의 것으로 살려 놓았다. 그뿐 아니라 이미 30년대에 그는 치열한 실험 정신과 문체 연구로 현대 한국어의 문장을 바꿔 놓음으로써 우리 문학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서 모두 성공적인 작품을 썼고 40년대에 이미 리얼리즘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하던 시절에도 그의 소설 속에는 모더니즘 시절에 이미 개발해 놓은 영화 기법, “장거리 문장”, 서술과 여러 화법의 구사와 특히 연결 어미의 능란한 사용으로 놀랍게 자연스러운 풍자를 넣으면서 ‘최대의 문장가’의 자리를 지켰다.
해방 이후에는 소재를 민중의 역사와 삶으로 바꿔 주로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가 서울에 남아 자유로운 창작 정신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아마 그는 더 훌륭한 문체로 찬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되어 못내 아쉽다. 역사 소설은 다른 작가들도 쓸 수 있지만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은 박태원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모더니스트 시절에 쓴 중단편들을 오늘날도 여전히 새로운 감동으로 한 단어, 한 문장마다 감탄하며 읽을 수 있는 것은 그의 문체가 참신하고 정확하고 새롭고 기계 조직처럼 숙고와 연구를 거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 하나의 쉼표도 치밀한 확인과 계산 없이는 쓰지 않았다. 그는 “내용으로는 이지적으로, 음향으로는 감각적으로, 동시에 언어는, 문장은, 독자의 감상 위에 충분한 효과를 갖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지적인 내용과 감각적인 문장이 합쳐질 때에만 비로소 예술성에 도달한 문학 작품이 나온다는 이 말은 그의 걸작들에서 그대로 확인되는 바이다.
요사이 특별히 박태원을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말이 전에 없이 외국어로 오염되고 컴퓨터에서 마구잡이로 쓰이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박태원의 일제 시대 때에도 우리말의 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작품 안에서 한문의 고사 성어나 일본어의 광고 문단을 직접 삽입하는 등 그 당시에 그가 구사하던 문화권의 언어를 모두 사용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중 표현의 효과가 되고 언어의 총체적인 묘사로 한국 문학 작품 속에 용해된 것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새로운 문체와 서술 기법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이 외국어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작품 안에 들어간 모든 말이 당대의 언어 현실을 정직하고 생동감 있게 전달해 주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문체적 기교의 개발에 한시도 게으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말의 우수성에 대한 자부심과 또 그 말을 쓰고 개발하여 작품으로 남기는 데에 희열과 보람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모든 작품의 한 문장 문장에서 넘치도록 느껴지는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느낀다.
그가 문장을 만들 때 우리 말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느끼는 행복감이, 결국은 처절한 위기 속에서도 저항력과 신념을 가지고 그를 끝까지 살아남게 한 작가의식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이런 철저한 장인 정신과 문학적 구원에 대한 신념이 현재 활동하고 있는 많은 우리 작가들에게서는 월등 덜 느껴져서 걱정이다.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는 이태준의 말처럼, “우리 민족의 최초요 최후의 문화인 조선어의 명맥을 끝까지 사수하기에 적당한” 작가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시대에 더욱 우수성이 증명된 우리말을 다시 부단히 시험하고 개발하여, 세계적으로 주도적인 과학적, 예술적 언어를 만들어야 할 우리 작가들의 부지런한 활동을 기대해 본다.
<이연행>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