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부모 공경

2006-09-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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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바로 되려면 새사람이 잘 들어와야 된다고 하였다. 훌륭한 부모에게 바른 교육을 받은 사람은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행복했던 가정에 들어가 평지 풍파를 일으키는 것을 주위에서 본다.
옛 어른들은 경로사상이 지극하여 부모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젊은이들이 제 아내가 원하면 부모까지 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서울 파고다 공원은 매일 많은 노인들이 무료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다. 아침에 아들한테 용돈 천원을 타 가지고 나오는 노인은 효자 아들을 두었다며 선망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며느리가 가족순위를 꼽을 때 첫째가 남편, 둘째가 자식, 셋째가 강아지, 넷째가 시부모라는 말이 있다. 강아지가 밥을 안 먹으면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시부모가 아프다면 ‘노쇠현상’으로 돌린단다.
제주도에 있는 양로원은 좀 특이한 곳이다. 노부모가 자녀와 합의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노인들이 대부분이란다. 효도관광 시켜주겠다는 자식의 말에 바다건너 먼 곳에 가서 버림받은 분들이다
아들이 의사라는 어느 할머니는 아들이 며칠후에 모시러 온다고 하고서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가 매일 창 밖을 보며 아들을 기다린 세월은 15년이라고 한다. 지금쯤 그 아들은 미국 어느 하늘 아래서 제 가족들과 재미있게 살고 있을지는 몰라도 어머니 가슴에는 지울 수 입는 한을 심었다. 부모의 은공을 모르는 부끄러운 아들이다.
집이 시골이었던 나는 서울에서 방을 얻어 동생들과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집주인은 어느 기업의 사장이고 안주인은 딸 셋에 늦둥이 아들을 낳았다고 아기가 엄마 등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학교에서 일찍 온 날 나는 기막힌 장면을 목격하였다. 아들을 업은 며느리가 시부모 방에서 소리치는 것이 밖으로 새어나왔다. 방을 들여다보니 며느리가 “이 원수 같은 늙은이는 왜 빨리 죽지도 않느냐”며 이리저리 걷어차니 할머니는 힘없이 방바닥으로 쓰러지고 할아버지는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볼 뿐 한마디 대항도 못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오늘 저녁은 굶길 터이니 어디 견디어 보라며 문이 부서지도록 닫고 며느리는 방을 나왔다.
나는 저녁밥을 지어 참기름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주먹밥을 만들어 며느리 몰래 할머니에게 갖다드렸더니 얼른 받아 이불속으로 감추셨다. 저녁 늦게 돌아온 아들은 방문을 삥긋이 열고 “아버지 어머니 잘 다녀왔습니다. 편히 주무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그 아들은 낮에 있었던 일을 알 리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셋째 아들이셨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살고 싶으시다는 뜻을 받들어 어머니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셨다. 무엇이든지 할아버지 할머니를 첫째로 모시는 것을 보고 자랐다. 농사일을 하다가도 어머니는 집에 들어와 새 점심밥을 지어 시부모에게 드렸다.
시부모는 사랑하는 남편을 낳아 길러준 분들이다.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분들인지를 왜 깨닫지 못할까. 누구나 나이 들어 늙으면 시아버지가 되고 시어머니가 될 터인데.

박 안젤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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